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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강해 08] 믿음에 근거한 사랑의 실천은 주의 제자 됨의 증거
운영자 2020-12-03 추천 0 댓글 0 조회 852
[성경본문] 요한Ⅰ서3:13-24 개역개정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믿음에 근거한 사랑의 실천은 주의 제자 됨의 증거

 

학창 시절에 우리가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성 프란시스가 지은 '평화를 구하는 기도'라는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이 기도시가 이토록 애송되는 까닭은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겠지만, 그러나 더 마음에 와 닿는 이유가 있으니, 이 시를 쓴 성 프란시스의 삶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과 신앙으로 일관된 성 프란시스의 삶이 이 한 편의 시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삶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았어요.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 영생을 얻는 사랑의 진리를 터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본받아 형제, 자매를 사랑하도록 성도들을 권고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미움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미움은 살인이라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미움은 죄의 결과요, 미움의 근원은 사탄,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힌두교왕국이었던 네팔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힌두교를 믿는 신도들에게 가장 감동적인 멧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사랑이었기에 진한 감동이 되었던 것입니다. 힌두교의 신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자들, ,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로운 힘으로 악마를 물리치는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삶이 힘들고, 지치고, 고단한 인생들을 체휼하고, 긍휼히 여기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자로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셨으니 저 하늘나라 천상에 계실 분이, 낮고 낮은 땅의 모습을 보시니, 인생이 불쌍했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죽어가는 인생을 보실 때에, 차마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처하시기를, “성부 하나님이여, 내가 세상에 내려가겠습니다.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대표자 되어 인생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인의 모습되어, 제물로 죽겠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얘기를 할 때면,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신이 인간을 그렇게까지 사랑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마음에 감동의 물결이 출렁입니다.

 

힌두교의 승들도 사랑을 가르칩니다. 힌두교의 경전들도 이웃 사랑에 대하여, 부모공경에 대하여 구구절절, 이야기로도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말 제일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그 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교리적으로 득도즉 진리를 깨닫는 것을 최고로 여기니, 그 방편으로 고행무소유그 결과로 청빈한 삶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과 용서와 섬김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행함과 실천으로 본을 보이셨으니, 십자가에 달리셔서 생명을 바쳐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그 실천은 큰 감동이 되고 마음을 움직이니 기독교로 개종하는 제일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사도요한은 이 사랑의 실천의 부분을 강조합니다. 성경본문 316,17,18, 세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교훈으로 받아들여서 가능할까요? 타종교에서도 그렇고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 교과서에도 많이 나오는 가르침이에요. 우리가 스승의 날 노래를 불러요.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르칩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는 사랑없어 각박하며, 사랑없어 신음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사도요한은 이에 대한 답으로 믿음이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계명에 쓰인대로 사랑이 마음에서 실천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 의지, 내 능력, 어느 정도 되겠지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으니, 죄된 우리의 심령이 먼저, 믿음으로 새생명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계명이 있어요. 도덕이 있어요. 교훈이 있어요. 가르치고, 듣고, 그러니 우리가 행하자! 하는 의지만 가지고서는 역부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말씀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런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믿으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날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 피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내가 죄사함을 받고 살게 되었다고 하는 이 복음이 내 마음에 밀물처럼 감동으로 차오를 때에, 그 은혜가 능력이 되고, 나를 변화시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도록 누가 어머니에게 자녀를 사랑하세요.” 계명으로, 교훈으로, 가르쳐서 사랑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본능적으로 사랑합니다. 내 피붙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마치 컴퓨터의 프로그램처럼 자녀가 있는 모든 어머니에게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터에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아기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품에 안고 자신은 총을 맞을지언정 아기를 살리고자 합니다.

 

1988년도 아르메니아에서는 대지진에 25,000명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무너진 건물 더미에서 30세 여인이 세 살짜리 아이와 함께 8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어요. 이 사실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또한 어른은 그렇다손 치더라고, 그 세 살짜리 어린 아기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수수께끼였습니다.

 

이 세 살짜리 아기가 무사히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상상치 못할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어요. 어머니는 자신의 손가락을 자신의 이빨로 물어뜯었습니다. 그래서 피가 흘러나오게 하였어요. 그리고 8일 동안 아기가 배고파 울적마다 말라버린 자신의 손가락을 다시금 물어 뜯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피를 빨게 해 준 것입니다. 그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 아기에게 자기 피를 빨게 했다는 것은 어머니는 이미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고서는 아기를 살려내기 못했을 것입니다.

 

이게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입니다. 모성애는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선행도 우리의 사랑도, 사랑의 실천도, 계명이기에 내가 지켜야지 아는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압니다. 그럼 무엇으로 됩니까?

 

내가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동에 젖어, 예수 그리스도를 내 영혼의 구원자로 마음에 믿고, 주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영접할 때에,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3장 마지막 절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거친 마음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나를 새롭게 기경하시고, 새 능력으로 부어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나를 변화시켜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어머니가 아가를 사랑하듯이 본능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니고 교훈으로가 아니고. 그저 평소의 삶에 성품으로 열매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 열매인 사랑이 성품 속에 배여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화구원의 단계에 있는 모습이에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고백했던 성 프란시스의 기도시의 연고가 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에 나그네가 찾아왔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나병환자였습니다. 이미 살이 썩어 냄새가 나는 그가 추위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를 안으로 들였습니다. 그가 배가 고프다고 했습니다. 사흘째 먹지를 못했다고 했습니다. 아침식사로 준비해 놓은 자신이 먹을 빵과 우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 먹고서도 가지를 않아요. 밖은 춥고 갈 곳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같은 방에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요. 그 침대를 내어 줍니다. 자신은 바닦에서 참을 청했습니다.

 

한 밤중 추위를 느꼈는지 그가 부탁을 했습니다. “너무 추워요. 죄송하지만 주인님 체온으로 제 몸을 데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 프란시스는 그 때에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쉽지 않지만 자신의 옷을 벗고 침대위로 올라가 그 문둥병자를 끌어 안았습니다. 도무지 잠을 못 이룰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꿈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꿈속에서 주님이 웃고 계셨습니다. “프란시스코야, 나는 네가 사랑하는 예수란다. 네가 나를 이렇게 극진히 대접했으니 하늘에 상이 클 것이다.”

아 주님! 저는 아무것도 주님께 드린 것이 없습니다.”

꿈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벌써 날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침대 곁에 문둥병자는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름냄새가 배어 있어야 할 침대에는 오히려 향긋한 향기만 남아 있을 뿐 왔다간 흔적도 없었습니다.

! 주님이셨군요. 주님이 부족한 저를 찾아와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깨닫고 문둥병자에게 대하면서 순간이나마 꺼려했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니 나서 회개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늘 파도처럼 물결치도록 그 감동이 여러분의 마음을 적시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내 능력이 아니오. 어머니가 아가를 사랑하는 것이 누가 가르쳐 주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하나님께서 심겨주신 그 성품으로 하듯이,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니 사랑이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시는 복된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추운겨울에 여러분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이 일터가 교회가 훈훈하고 따뜻한 성탄의 계절이 될 수 있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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