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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강해 04]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운영자 2020-11-17 추천 0 댓글 0 조회 864
[성경본문] 요한Ⅰ서2:7-11 개역개정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지난 금요일 기도회 시간에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을 받았던 이기풍 목사님의 얘기를 짧게 소개했었습니다. 그가 예수 믿기 전에, 평양에서 그는 성격이 괄괄한 인물로 소문이 났을 적에, 그가 처음으로 얼굴이 희고 키가 큰 외국인인 마펫 선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보니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크니, 누가 더 쎈가? 나 보다 더 쎈가? 하는 고약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돌팔매질을 잘 하기로 유명했던 그는 동료들을 데리고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사는 집을 찾아가서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깰 때에, 그 선교사가 나와서 자신과 한번 싸움을 붙을 줄 알았으나 나서지 않아 이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터에서 서툰 한국말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는 마펫 선교사를 본 이기풍은 돌을 던져 그의 턱을 맞추었습니다. 마펫 선교사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의 턱에는 그 상처로 인해 흉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기풍은 그렇게 선교사를 못살게 굴며, 건축 중인 장대현 교회를 때려 부수고, 횡포를 부리고, 폭력을 일삼던 중,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인데, 성령께서 그의 꿈속에, 마펫 선교사가 돌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여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게 하니 그로인해 밥맛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가 원산으로 이사 가서 살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서양 선교사인 스왈른 선교사를 만나게 되니, 같은 백인이니 생긴 것이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기풍의 마음에는 다시금 마펫 선교사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가만히 있었을까? 집에 유리창이 깨어지고, 또 내가 던진 돌에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지고, 장대현 교회 건축에 훼방을 일삼는데 왜 가만히 있는가?” 그것이 의아하였습니다. 나에게 덤비든지 경찰에 고발을 하든지 해야 정상인데?”

 

그러한 심리적 상황에서 이기풍은 원산에서 스왈른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그곳에서 지난 과거를 회개하고, 1896년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시금 평양으로 온 그는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를 조건 없이 용서하는 마펫 선교사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마펫 선교사님은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교장선생님 이었어요. 그래서 이기풍은 가장 젊은 나이로 제1회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고, 졸업 후에는 자원하여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 복음화에 혁혁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만일에 마펫 선교사님이 자신에 집에 돌을 던지며 집의 유리창을 깼을 때에 분노를 표하고, 또는 그를 경찰에 고발했다면 어떤 변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 돌을 던져 흉이 남을 정도로 핍박했던 그를 경찰에 넘기고 용서하지 아니 했었더라면 과연 이기풍은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 사랑은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은 그 주제가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관하여 사도요한은 표현하기를 두 종류의 사랑이 있으니 옛 계명새 계명이란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그러면 7절에서 언급하는 새 계명은 무엇이고 옛 계명은 무엇일까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7절을 볼 때에는 결국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8절에서는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으로 쓰노니라고 표현하니 헛갈리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그 이유가 있으니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사랑에 대해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사랑에 관한 가르침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어요.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3:34,35)

 

예수님도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새 계명이라고 표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새 계명사랑에 관한 것임을, 9절과 10절에서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8절과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서 사랑을 말씀하실 때에, 그 상황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유월절을 지킬 적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서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발을 씻기시기 전에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 서로 큰 자라고 다투었었습니다. 이제 곧 제자들과 헤어져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는데 그 철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심난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모습은 마치 아직 철없는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사고나 질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마음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랑에 관하여 구약에 기록한 사랑은 왜 옛 계명이라 표현했을까요? 일찍이 구약성경에도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1918절은 말씀하기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처럼 사랑은 신약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 시대부터 있었던 옛 계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사역당시에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24:20) 라는 차원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내면에 흐르는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함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강조하시고 일깨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이웃사랑이 전혀 새로운 계명으로 느껴졌던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 중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백성이 율법을 지키는가 안 지키는가, 그 외적인 모습을 보고,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죄인으로 정죄하였습니다. 마치 그 모습은 오늘날 죄인을 잡아들이는 경찰관의 모습이었어요. 거기에 자비와 사랑이란 정신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을 누구보다 의인으로 여겼습니다. 사랑이 없는 의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랑의 정신이 사라진 율법 해석을 다시금 바로 잡으셨습니다. 율법은 지킴으로 사람이 살아나야 하는데, 거꾸로 율법 때문에 사람을 정죄하는 모습만이 강조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오늘날에도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행하지 않을 때, 그 계명은 우리에게 죽은 계명, 구태 의연한 옛 계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해석하신 구약율법의 사랑은 친히 실천으로 보여주셨으니 그 범위가 죄인에게까지 확장된 것이었습니다. 정통 유대교인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며 적대시했던 버림받은 자들과 죄인을 자신의 벗으로 여기셨으며, 모든 인류를 자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에게까지 퍼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새 계명으로서의 사랑은 자신을 배척하고 미워하며 조롱하는 자들까지 포함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자신을 위하는 자들만을 사랑하는 이기심의 벽을 허물고 심지어 자신을 죽이는 자들까지 사랑하는 깊이 있는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계명이었던 사랑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표준으로 되살아난 새 계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이 사도요한을 감동시켰습니다. 이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까? 사도요한은 빛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자는 할 수 있다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만이 이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8절에는 "예수를 믿는 자는 그 마음에 어둠이 물러가고 참 빛이 비춘다"고 했습니다. 10절에는 말씀하기를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아직도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제목도 그러지 않습니까? 나의 건강, 나의 자녀, 나의 사업, 나의 미래, 나의 행복....” 내가 잘 되고 봐야지! 물론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러나 정말 나의 사랑이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을 때에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기꺼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에 여러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구하다가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한 신부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마더 데레사나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우는 슈바이쳐의 모습도 그러한 모습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몇분 알고 있습니다. 의사로 한국에서 잘 나갈 수도 있는데, 네팔, 몽고와 같은 오지에, 의사가 없는 곳에서 선교사로 자원하여 평생을 드리는 분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은혜를 주시고 감동주실 때에 기꺼이 순종하여 옥합을 깨뜨려 나의 시간, 나의 물질, 나의 은사를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 심령에는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신령한 기쁨과 보람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이 신령한 은혜와 축복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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