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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강해 02] 좁은 길, 우리가 가야 할 길
운영자 2020-10-23 추천 0 댓글 0 조회 674
[성경본문] 에스라2:1-2 개역개정

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

2.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본문] 에스라2:64-67 개역개정

64.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65.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66. 말이 칠백삼십육이요 노새가 이백사십오요

67. 낙타가 사백삼십오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이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좁은 길, 우리가 가야 할 길

 

주전 587년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들은 그 이방 땅에서 70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했어요. 그러는 사이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되고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고레스는 선정을 베풀게 되니,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을 했습니다. 나아가서 고레스 왕은 바베론에 의해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돕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1장에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 고레스왕의 마음을 감동시키므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오늘 2장의 내용은 이 때에 약속의 땅이요, 자신들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돌아간 사람들이 얼마나 되고 그 지도자들은 누구였는가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명단을 작성하면서 먼저는 지도자들의 이름을 기록했어요. 2절에 보니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이름이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스룹바벨은 다윗의 후손으로써 유대인의 정치적인 지도자요, 예수아는 대제사장의 후손으로써 종교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돌아온 자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는지 64절에 기록했어요. 사만 이천삼백육십명이고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명이라고 했으니, 다 합치면, 사만 구천팔백구십칠명인데, 약 오만여명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제1차 포로귀환이라고 하는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지 50년 만인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으며, 이후 제2차 포로귀환이 있으니, 주전 458년에 에스라를 지도자로 세우고, 천칠백오십사명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귀환이 있었으니 주전 444년에 느헤미야를 지도자로 돌아옵니다. 그 숫자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에스더 왕비의 민족을 구하는 사건이 언제 있었는가? 이는 주전 478년에 에스더가 왕비로 발탁되었으니, 에스더서에 기록된 사건들은,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에스라서 6장과 7장 사이의 기간 동안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1차로 바벨론 포로지를 떠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 그리고 나서 제2차로 유대백성들이 에스라와 함께 돌아오기 전, 그 기간이 약 78년이 되는데, 그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면 이 에스라서와 에스더서와 그리고 느헤미야서가 같은 시대, 페르시아 왕국과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시대에 쓰여진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또 언제 적 인물인가? 포로시대에 있었던 얘기 같은데.....??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사자 굴에 들어갔으나 살아났던 다니엘의 사건은 훨씬 이전 바벨론 시대에 있었던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 포로귀환은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 시대에 되어진 일입니다. 어떻게 역사연대의 그림이 잘 그려지셨기를 바랍니다.

 

~,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영적교훈과 적용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돌아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그 선정을 베푸는 나라에서 그냥 살아도 좋을 것 같은데 돌아가고자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자신들의 고국이겠지요. 둘째,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정해주신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제는 폐허가 나라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고, 성벽도 무너졌습니다. 문명은 사라진 곳입니다. 반면에 페르시아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비옥한 지대에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이제 고레스왕은 그 땅에 와 있는 모든 종족에게 선정을 베풀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당시에 바벨론 땅에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100만 명이었습니다. 1차 귀환에 참여한 사람은 불과 5만 명이었어요. 돌아가는 그 길은 1,400킬로미터나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집도 새로 지어야 하고, 먹고 살 밭과 터전도 새롭게 가꾸어야 합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굳이 고생을 자초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약속의 땅, 조상들의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고국입니다. 또한 다른 민족, 왕국의 정치적 제재를 받지 아니하는 자주정부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전장인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찾아가서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서 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제사가 다시금 회복되기 위하여, 이방신을 섬기는 타국에서 평안과 편리함을 누리기보다는, 성전을 다시금 재건하고 여호와 신앙으로, 다시금 일어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아주 단호한 신앙중심의 모습은, 민족적 특성 상, 우리 민족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일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정치적으로 자유를 누리기 위해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가서 만주와 상하이에서 살았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좀 더 평안하게 잘 살아보자 생각하여 미국으로, 카나다로 호주와 뉴질랜드도 이민가서 사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국을 떠난 퓨리탄들이 미국 신대륙으로 가서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미개척 대륙을 개발하고 마침내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로 세운 그와 같은 모습은 아시안 국가에서는, 우리 민족을 포함하여 참 찾기가 어렵습니다.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땅이 좋아서 페르시아의 정책이 좋아서 그곳에 안주하기로 하였다면 성전재건이 이루어지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가 다시금 그 약속의 땅에서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고 적용해야 할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사람들을 기억하셨고, 이렇게 영원히 보존될 성경에 그 이름들을 기록으로 남기십니다.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하여 길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떠나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것도 있었습니다. 가서 살게 될 예루살렘이 50년의 세월 속에 얼마나 폐허가 되었는지 짐작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가리켜 프론티어(Frontier)라고 부릅니다. 앞장서는 사람들, 즉 개척자라는 뜻이죠. 성경의 언어로 표현하면, 그 길이 협착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아니하는, 좁은 길을 가는 자입니다. 자원하여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편안한 곳에서 고생길이 뻔 한 선교지로 떠나는 자의 모습일 것이요, 자신이 가진 은사를 가지고, 어려운 자들을 돕기 위해, 휴가를 반납하고, 기꺼이 시간과 물질을 나누는 자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나는 교회 옆에 있으리라. 더 빨리, 더 많은 시간으로 섬기기 위하여!” 더욱이 중직자의 직분을 받은 자로서 교회에서 먼 곳으로 이사 가지 않고, 그 삶을 고수하는 자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에서 그러한 성도들의 모습을 봅니다. 직장에 더 가까이 갈 수도 있는데, 아니면 자녀교육에 우선을 두고 좀 더 좋은 학군으로 이사 갈 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필요, 교회의 필요, 그 자리에 서기 원하여, 고심을 하고, 기도하고, 거처를 정하는 모습을 볼 때에, 제가 숙연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요? 그래, 내가 네 수고를 안다. 헌신을 안다.” 그러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시대의 교회의 지도자상을 봅니다. 어떻게 하면 시대적 대세의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성경이 말씀하고,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준, 참 목자상의 모습으로 지탱하며, 인내하며, 절제하며, 견뎌낼 수 있을까? 그것이 매일 새벽 저의 기도제목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교회의 방향을 늘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교회를 건강하게, 이웃을 행복하게, 가정을 행복하게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이하면서 더 깊이 생각하고 다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이 새벽을 깨우고, 기도하는 여러분들로 인해 우리는 서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면면히 영적파워를 유지해 갑니다. 금요기도회도 마찬가지에요. 비록 각 자의 소원을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아뢰겠지만, 그래도 교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좁은 길을 걷는 자를 결코 잊지 아니하십니다. 또한 그들을 무리 앞에 세우십니다. 2절의 말씀처럼 예루살렘에 성전재건을 위해 길을 떠나는 자들의 앞에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세우시고, 그 뒤에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를 세우십니다. 누군가 앞서 걸어가지 않으면, 뒤에서 따라오는 자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앞에 서서 걸어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앞에서 걸어가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온갖 멸시천대를 받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사망의 쏘는 것을 이기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서도 하늘찬송을 부를 수 있는 영성의 소유자들로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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