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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25] 전도와 선교; 사람 사랑으로부터
운영자 2020-02-12 추천 2 댓글 0 조회 791
[성경본문] 마태복음25:35-46 개역개정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전도와 선교; 사람 사랑으로부터

 

유명한 심리학자인 Abraham Maslow라고 하는 분은 인간의 욕구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필요의 위계질서 라고 하는 것을 나름대로 정의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무엇을 필요로 하며 살아가는가?” 그 순위를 나름대로 정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인간을 연구하는 심리학 또는 상담학 분야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학문적 원리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7단계로 그린 유명한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그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 쪽, 그 기저에는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으며, 그 위에는 그 첫 번째 것이 어느 정도 충족된 사람들이 또 필요로 하는 것이 나타나 있고 또 그 윗단계는 그 두 번째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된 사람들이 원하는 욕구가 순차적으로 그려졌습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사람의 욕망이 왜 그처럼 끝이 없는가 하는 것을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필요, 없어서는 아니 될 필수적인 필요는 육체적인 필요라고 지적합니다. , 먹는 문제, 건강욕구, 휴식, 성에 대한 욕구 등 어찌보면 동물도 본능적으로 갖는 이 욕구들이 내재되어있다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그 피라미드의 두 번째 단계는 안전에 대한 필요라고 지적했습니다. 안전하게 살고 싶은 마음, 주택을 갖고 싶은 욕구, 경제적 안정, 정서적 안정, 삶의 두려움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 사업의 안정, 가정의 안정, 가정의 안정, 직장의 안정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어요. 흔히 일반적으로 종교를 갖고자하는 인간의 욕구는 바로 이 안정이라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인간의 필요에서 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이 단계의 여섯 번째 단계인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고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는 이른바 구도자의 욕망의 단계와는 별개예요. 그저 종교를 갖는 것을 자기 안정의 한 방편으로 보는 단계인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단계는 사랑, 애정, ,녀간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또는 어느 단체에 소속하려는 욕구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시간이 충분치 않은 고로 이 일곱 단계를 이 시간 다 논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알고 넘어가기를 원하는 것은 사람의 욕구란 여기에서 말하듯 그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아니하면 결코 그 다음 단계의 욕구로 가기가 쉽지 않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아신 주님은 그것이 인간 누구에게나 마련되어져야 할 것을, 친히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그러나 생명과도 같은 필요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뭐 대단하거나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필수적인 것입니다. 매슬로우가 표현 것으로 비추어보면 제1단계 바로 육체적 필요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가 주릴 때에는 먹을 것을 주어라, 누가 목마를 때에는 마시게 하고, 나그네가 되어 거할 곳이 없는 자에게는 묵을 곳을 마련하고, 벗었을 때에는 옷을 주어 입게하고, 병들었을 때에는 돌보라고 하시며, 뭔가 잘못하여 옥에 갇힌자가 있거든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해라(25:42,43)

 

더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말씀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나아가서 이와 같은 선한 행위 아니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영벌을 받을 것과 행하는 자는 영생의 축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종이 필리핀 선교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교사 기본 훈련 과정 중 하나는 노방 전도 였습니다. 제가 어떤 한 분에게 예수를 믿으시라고 전도할 적에 그 분의 입에서는 제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응답을 하였어요. 그 분의 말인 즉,

나는 조상 대대로 카톨릭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사랑에 대하여 저는 저의 조상들로부터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서 새로운 개신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주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당황한 저는 다시 말씀드리기를, 개신교회로 적을 옮기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예수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 인생에 대하여 무어라 말씀하는지, 구원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성경말씀을 통해 함께 알아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이가 지긋하신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런 것이 나에게는 의미없다는 그런 표정이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깨끗하게 판정패를 당하고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한 번 뿐만 아니고 또 다시 또 다른 사람의 입으로부터 저는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 선교사로서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까? 어떻게 전도를 해야 할까?

 

그 이후에 저는 필리핀 역사에 대해, 특히 처음 스페인에서 들어온 수도사들의 전도 사역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 역사를 더듬어 가는 동안 저는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도사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섬김과 봉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초기 수도사 중의 한 사람인 St. John의 섬김의 사역은 이 종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저는 그 분의 생애를 읽어나가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동이 되어 외쳤습니다.

! 이 모습을 보고 그가 전하는 도를 받지 않을 자가 도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당시 카톨릭이 왕성한 스페인 나라의 한 성직자로서 얼마든지 대우받으면서 사역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고향을 떠나와 열대의 군도, 말라리아와 굶주림과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 미개한 식민지 국가 필리핀에 들어와서, 몰려드는 수많은 결핵 환자들을 위해서, 또한 나병 환자들을 위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때로는 의사로, 때로는 전도자로, 온몸으로 그가 섬긴 필리핀인들......., 그들은 그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의 넬슨제독에게 참패하므로 스페인은 국가적으로 기울게 되고 실패하여 필리핀을 떠나게 됩니다. 스페인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익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카톨릭은 여전히 저들의 종교로 남아있고, 필리핀인 가운데 70%를 유지하며, 아시아의 유일한 카톨릭 국가로 건재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필리핀 사람들이 문화속에 가지고 있는 Value, 가치, 다시 말하면 미덕 중에 으뜸이 되는 것은, "Utang na lo-op"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면 그는 배은망덕한 자, 아니 배은망덕한 놈이 되어, 아무도 그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카톨릭 수도사들의 그 헌신된 봉사와 섬김 속에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생각으로 대를 이어 살아온 것입니다.

 

저는 그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필리핀에서 시작된 선교의 역사를 더듬게 되었어요. 그러나 그 효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개신교 역사 150년이 넘은 지금 약 10%의 저조한 개신교의 성장을 보였습니다.

 

제가 개신교 선교역사속에 발견한 것은 때로는 섬김과 봉사가 있는 선교사의 모습도 있었으나 과거 카톨릭 수도사들의 헌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이 말씀만을 전하려 했지 저들의 실제적인 삶의 필요에 무관심한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저들이 어려울적의 수도사들의 헌신에 감동을 받은 저들이 그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적인 선교의 전략을 수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직 카톨릭의 섬김과 봉사가 미치지 않은 곳인 아이타 산지부족에게 집중하자.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카톨릭을 알지 못하는 아이타 부족에게 집중하자. 그리고 말씀으로만 하는 전도하는 사역이 아니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사랑과 섬김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자.

 

그러므로 저는 많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형제들을 위해 집을 개방하고, 아예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로 살았습니다. 아픈자들을 병원으로 나르며, 저들이 배고파 할 적에는 빵과 쌀을 사들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는 참으로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모한 짓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 한 사람, 두 사람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깨달음으로 알게 된 것은 이것입니다. 제 자신도, 제 아내도, 받는 것 보다 주는 자의 마음이 기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은 선교지의 형제들도 귀하지만 저 자신도 귀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저의 성품을 변화시키십니다.

 

저의 기도 제목은 늘 그런 것이었습니다.

주님 더 도와주어야 하는데요. 주님, 또 한 형제의 딸이 죽어갑니다. 병원비가 필요한데요. 주님, 어찌 나 혼자만 밥을 먹습니까? 저들은 주리고 있는데.... ” 돕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 나눌 것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 그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안그랬어요. “내가 어떻게 선교지에서 견딜까? 내 가족이 어찌 살아갈까?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러한 나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기도가 많이 드려졌는데, 그 때부터 이타적인 기도제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생각하고 이웃의 필요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랬어요. “! 나도 언어를 열심히 배워 바울처럼 말씀으로 승부를 내자!”

말씀 속에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선교지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더라구요. 배고픈 그들에게는 먼저 빵이 복음이었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잘 사는 나라에서는 선교사가 주는 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지치고 상한 저들의 말을 들어주고,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복음으로 치유하는 것이 맞지요. 그러나 성경이 기록된 예수님 시대에는 배고픈 사람이 많았던 시대요,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소식,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하나님의 말씀도 필요했지만 받은 바 은혜를 나누는 일도 필요했고, 아픈 저들을 병원에 데려가 치료하는 일도 필요했습니다. 저들에게는 진리이전에, 인륜이 귀했고 인륜보다 더 귀했던 것은 저들의 배를 채워야 할 빵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언제나 제 마음에 염려가 된 것은, 카톨릭이 아이타 부족에게 들어오면 어찌하나 저들은 막강한 금력과 또한 정부의 힘을 가지고 들어올텐데 그러면 배고픈 이들이 저들에게로 갈 텐데, 주는 밥을 먹는거야 좋치만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 할 텐데 하는 것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카톨릭의 사제와 수녀들이 까왁 마을에 트럭으로 쌀을 실고 들어왔어요. 주일 날 아침인데, 예배 시간에 자리가 텅텅 비었습니다. 몇 사람이 앉아 있는데, 제 눈치를 슬금 슬금 보고 있어요. 왜요? 나도 가고 싶은데...선교사님 보기 미안해서...

저의 마음이 괴롭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어찌해야 좋을까요?” 그 때 주님은 바로 마태복음 25장의 말씀, 오늘의 본문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내가 목마를때에 마시게 하였고,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저는 강대상에 서서 모인 저들에게 말했습니다.

”Manga Kapatid na Minamahal! Tapusin natin na madali ang Ating Pagsisimba upng tangapin ang Pagpapala dyan sa simbahan ng Roman Catolico." 말인즉,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예배를 일찍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가서 캐톨릭에서 나누어주는 일용할 양식을 받읍시다.”

 

늦게 가면 못 받으니까, 예배를 일찍 마쳤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그곳에 몰려 갔습니다.

개 중에 어떤 분들은 저의 눈치를 보면서 갑니다.

어떤 분은 집으로 가는 척 하면서 싹 방향을 바꿔 그리로 쏜살 같이 갑니다.

전도사를 포함한 몇 명의 형제 자매들은 안갑니다.

제가 말합니다. “가서 받으세요.”

저는 그들이 오늘 당장 먹을 것이 없음을 압니다. 내가 줄 것이 없는데 왜 남이 주는 것 받아 먹지도 못하게 해요. 그러나 그들은 안 갑니다.

 

그런데 제가 또 고민합니다. 가서 카톨릭 신부한테 고맙다고 얘기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생각하다 내가거기 가면 성도들이 미안해 할까봐 관두기로 하고 텅빈 예배당에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의 뜻 인줄 압니다. 저는 싫치만 주님은 원하시는 줄 압니다.” 멀리서 쌀을 받고 구제품을 받고 기뻐하는 환호성 소리들이 들려 옵니다.

 

그 다음 주에,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예상과 달리, 예배당에 성도들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 쌀 받으러 갖던 형제, 자매들도 다 왔어요. 그래서 제가 내심 기분은 좋으면서 물었어요.

아니 카톨릭에서 나눠주는 쌀 받고 거기를 가야지 왜 또 이리로 왔어요? 그랬더니 그가 말해요. “오늘은 없어요!”

! 오늘은 나눠주는게 없어서... 그럼 다음에 또 나눠주면 또 가겠네요.” 그랬더니 씩 웃어요, 그러더니 하는 말이

그래도, 우리는 이 마을에 올 때부터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어요, 우리가 어찌 그 은혜를 잊겠어요. 나중에 잘 살면 거길 뭣하러 가요, 안가요.절대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기 전에, 인륜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고, 인륜을 말하기 전에 사람의 필요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필요에 대한 관심,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하고,

목마른 자는 물이 필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거처없는 나그네가 되었을 때에는 잠을 잘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하고,

입을 옷이 없어 벗엇을 때에는 입혀야 하며,

병들었을 때에는 돌아보아야 하고,

어떤 잘못으로 감옥에 갖힌자가 있다면 찾아가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은 곧 하나님의 관심이요, 사람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곧 전도와 선교의 시작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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