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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23] 바리새인의 잘못
운영자 2020-02-07 추천 1 댓글 0 조회 801
[성경본문] 마태복음23:1-13 개역개정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바리새인의 잘못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마태복음 제23장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기 전 3일전의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잡히시게 되는데 이 장면은 마태복음에서는 26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코앞에 두신 예수님의 모습은 평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이십니다. 좀 더 직설적인 말씀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꾸짖고 계십니다. 성전을 깨끗케 하실 때에도 상을 엎으셨고, 노끈으로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그와 같은 상업적인 행위들을 통해 부당이익을 취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 전에는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음모로부터 피해 다니셨어요. 그리고 때로는 은둔자의 모습으로 숨어계시기도 하셨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시고 이스라엘의 심장부인 예수살렘과 성전에서 만인이 보는 가운데 직설적으로 저들의 잘못을 꾸짖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공생애를 통해 당신이 하셔야 할 세 가지 의무인 천국을 소개하는 복음전파 사역과 천국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치시는 사역과 병들고 귀신 들린 자들과 죽은 자를 살리시는 사역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시는 일을 거의 다 마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남은일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의 대속자로써 죄인이 아니시지만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실 일만 남아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잡혀가도 상관이 없었어요. 아니 오히려 이제는 잡혀가실 상황을 만들어가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이와 같은 사명 완수하시기 위해 잡히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셨고 자신의 하신 기적의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하셨던 이유는 시간을 벌고자 하신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러실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어요. 이제 마지막 남은 사명은 죄인의 모습으로 잡히시는 일이었으며 빌라도의 심판으로 받고 십자가에 달리실 일이 남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빈틈없는 모습으로 마음에 품고 계신 사명을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감동이 되는 것은 사명자의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철저하게 드리는 것이구나! 생명까지도 드리는 것이구나!”

 

예수님께서는 무작정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우셨고, 그 때를 준비해야 하셨고, 무엇보다도 죽음이 앞을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담대한 마음으로 사명완수를 해 나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 담대하심으로 인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와 같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천분의 일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나에게 맡겨주신 귀한 직분, 그 직분에 맞는 귀한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정말 최선을 다해 감당하겠다는 다짐을 하시는 여러분과 저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오늘 23장에서 예수님은 아주 신랄하고 직선적인 언어로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적이고 행함이 없는 가르침에 대해서 비판하십니다. ? 이토록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눈 밖에 난 것일까요?

 

오늘 성경 23장 전체를 통해 그 잘못된 모습들이 예수님의 지적 속에 낱낱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여러 잘못된 모습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큰 틀에서 요약해 본다면 세 가지로 묶어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습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러면 안되겠다는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는 외식적인 행위입니다.

5~7절 말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그래서 옷도 특별하고 멋지게 입고 경건성을 최대로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기본적 자세가 잘못된 것은 성경에 말씀한 대로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왜 사람에게 지요? 말씀에 있는 대로 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 받고자 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선교사역을 감당할 때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네팔과 같은 경우, 선교사의 신분이 탄로 나면 안 되니, 평상 시, 목사가 입는 예복을 입지 못하고 또 예배 시에도 목사 가운을 입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소위 예전주의로 발전하여 목사 가운이 점점 화려해 진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왜 천주교의 그 화려한 모습을 닮아가는 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는 목사 가운에 나는 박사입니다.” 드러내기 위하여, 양 팔에 세 개의 띠가 드리워진 박사 가운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받은 학위를, 굳이 예배 시간에, 예배를 인도하면서, 드러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대접과 존경을 받고, 그로 인해 영화로운 인생을 추구하고자 했던 모습이 있었어요. 그러므로 속마음은 아닌데 겉모습은 경건을 추구하는 모습을 취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하셨나요?

그는 인기를 멀리하셨습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이후에 그를 임금으로 삼고자 하는 백성들의 인기를 피하여 산위로 가셨습니다. 가서 기도하셨어요.

 

이 시대의 영성지도자라고 하는 헨리 나우웬 이라는 분은 사명자들이 제일 멀리해야 할 세가지 유혹 중에 하나는 stardom이라고 했어요. 스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인기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주의 종이 주의해야 할 치명적인 유혹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인기는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고 했어요.

 

기독교정신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인데, 그런데 인기는 받기만 하는 것이라 받고 또 받기를 반복하다 보면, 이는 중독성이 있어서,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고 했어요. 먼저는 개인이 인기의 포로가 되어버린다고 했어요. 인기가 떨어져 버리면 허무한 것이에요. 그러나 인기가 많아지면, 그런 마음에는 주님이 왕으로 서실 자리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세요.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선생님은 한분 밖에 없다고 했어요. 사람들의 초점을 받아야 할 스승은 한 분밖에 없으니......,여러분, 누가 우리의 선생이 되십니까? 우리 예수님만이 우리의 선생님이 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모두 차별이 없이, 목사도 신학자도 성도도 다 같습니다. 다 양일 뿐입니다. 그러니 차별 없이, 함께, 참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이 스승으로 알아, 함께 바라보며, 함께 따르는 것입니다.

 

둘째는 실천없는 가르침입니다.

3절에 주께서 지적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주의 종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이웃사랑에 있어서, 전도하는 일에 있어서, 헌금을 드리는 일에 있어서, 성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본을 보이지 못한다면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선교사들 중에, 정작 선교지에 어려운 자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기 보다는, 선교지를 방문하는 후원자들과 교제를 하기를 즐겨하며, 더 많은 시간을 거기에 할애하는 선교사들이 있어요. 그래서 너무 자주 고국방문을 하는 선교사의 부류가 있습니다. 무엇이 잘 못된 것입니까?

 

그런데 고국에 와 보니, 비슷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주의 종으로 교우들 중에 부유한 자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교제하고, 대접하기를 즐거워하지만, 반대편에 있는, 가난하고 힘든 자를 위하여, 함께 하고, 섬기는 일을 등한시 하는 모습이 있어요. 그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일까요?

 

또 주님은 23절에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하나님께 곡물과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어질고, 사랑으로, 남을 불쌍히 여김, 돌보고자 하는 마음), 믿음(신실함, 진실함, 거짓없음)은 버렸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십일조는 십일조대로 당연히 드려야 하고, 그리고 마음의 자세, 삶의 자세, 이와 같은 마음을 통한 정직과 인애과 믿음직한 신실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며 본인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가르치기만 잘 가르치려고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러시면서 24절에 그와 같은 행함이 없는 가르침에 대해 꾸짖으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포도주를 귀한 음료로 사용했는데, 채를 사용해서 포도주에 빠진 하루살이를 걸러냈어요. 상대적으로 큰 낙타는 아주 크고 불결한 짐승으로 간주되었는데, 정작 이는 무시해 버렸다는 말씀을 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성전의 제단에 다양한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면서, 정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빼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삶으로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백성들에게 율법의 올무를 씌운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모세오경을 기초로 수 많은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그 규례들이 613가지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그것뿐만 아니었어요.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미쉬나라고 하는 규례집에 수천개의 율법을 기록하고 그것을 유전이라 칭하며 엄격하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지키나 안지키나 아주 엄격하게 감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유전들, 규례들은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어요. 예를 들어 안식일에는 노동하면 안된다. 하면서 상처도 치료하지 못하게 하였고 예수님이 앉은뱅이를 고치셨을때에 예수님이 그 앉은뱅이를 고친 것도 노동을 하였으니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자신이 누웠던 들것을 들고 가려고 하는 것도 노동이라고 하면서,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라고 그 규례집에 기록된 율법에 근거하여 정죄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화를 내시며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 하여 삶이 힘들고 어려운 병자를 고치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반박하셨습니다.

 

이렇게 율법의 올무를 만들어 놓고 본인들도 올무에 얽매이고 사람들도 얽매이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기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무가 되어버리고 짐이 되어버리고 멍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종교적 행위에 지쳐버렸습니다. 기쁨이 사라졌어요. 이 무서운 율법주의가 저들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8절에 말씀하십니다. “(수백가지의 율법을 지키느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달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 죄악까지도, 다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시고 그 분의 안식에로의 초청의 자리에 나아가 참으로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하는 진정한 안식을 가지시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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