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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22] 거룩한 분노
운영자 2020-02-05 추천 2 댓글 0 조회 672
[성경본문] 마태복음21:12-17 개역개정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거룩한 분노

 

예수님께서는 이전에도 몇 차례 예수살렘을 방문하신 적이 있지만 이번의 방문은 그 의미와 중요성에 있어서 이전과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시는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과 사역의 주 무대인 갈릴리로 돌아가실 수 없음을 알고 계셨어요. 이번 예루살렘 방문 시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 사역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남은 일은 십자가에 대속주로 달려 돌아가실 일만 남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숨기지고 아니하십니다. 그러니 자신을 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정면으로 돌파해 나가십니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만왕의 왕이신 주의 영광을 역력히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논박과, 두 아들과 불의한 농부 비유를 배열하여, 영광의 주를 죽이고자 하는 불의의 음모가 치열해지고 있음을 21장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12절 이하에 언급하고 있는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성정을 갖고 계셨어요. 그는 기뻐하셨고, 때론 슬퍼하셨으며, 눈물을 흘리셨고, 또한 분노하셨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인간이셨기에 감정을 드러내시곤 하셨습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를 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저들을 향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시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타당한 분노였습니다. 흔히 작고 사소한 일로 흥분하기 쉬운 우리의 감정과 달리 예수님의 분노는 타당한 것이어서 우리는 이를 거룩한 분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룩한 분노라고 말할 적에 제 마음에는 학창시절에 외웠던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변영로 선생님이 쓴 논개라는 시입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립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논개의 분노를 변영로 시인은 거룩한 분노라고 표현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논개는 조선시대의 기녀였습니다. 그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땅을 쳐들어 갖은 만행과 약탈을 일삼는 일본군의 수장의 술시중을 들어야 했어요. 그 일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습니다. 결국 논개는 결심합니다. 자신의 한 몸을 바쳐 조국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비장한 각오로 일본의 장수에게 술시중을 들고 절벽으로 유인합니다. 그리고는 그를 안고 강으로 함께 뛰어 내립니다. 그녀가 얼마나 세게 그 일본장수를 안고 떨어졌는지 물속에서도 손에 깍지가 풀어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거룩한 분노는 의기의 분노입니다. 이 분노는 자신의 사사로운 이를 취하기 위한 분노가 아닙니다. 철저히 자신은 죽어지고, 정의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분노와 상반되는 상황을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예수님이 살고자 했다면, 그는 유대인을 향하여 빌라도를 향하여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때에 예수님은 분노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니 분노는커녕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모릅니다. 용서하소서!” 그래서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너무 대조적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예수님은 분노하십니다. 자신이 부당하게 취급당하고 죄인 아닌 죄인으로 가장 처참하고 무서운 십자가형에 처할 적에도 분노하시지 않던 그가, 마치 연한 순 같고 순한 양처럼, 십자가로 나가신 주님이 오늘 이 성전에서 화를 내십니다. 분노하세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때는 유대인의 3대 명절중의 하나인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이 절기는 출애굽을 기념하는 명절로써 이스라엘 남자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유월절을 지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고자 할 때에 예수님은 그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짐승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머나먼 여행길에 짐승을 가져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가져온다 할지라도 며칠 동안 오는 길에 지치고 또는 다치고 해서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받아주지 아니했습니다. 당연히 성전지기와 또는 제사장들은 이곳에서 상인들로 하여금 짐승을 팔게 하였고 그 상인들로부터 이익금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모습에 분노하셨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요한복음 기자는 묘사하기를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그것을 휘두르시며, 양이나 소를 다 내 쫓으셨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돈을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었습니다.

 

예루살렘 밖에서 통용되는 돈에는 로마의 황제의 얼굴이나 또는 이교도의 상이 주조되어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화폐로 바꾸면서 이 상인들은 성전지기와 더불어 환차 이윤을 얻었던 것입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 라고 말씀하시며 화를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면 강도의 굴혈은 무엇입니까?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성별된 집이여야 하는데, 사고 파는 자들이 그곳에서 물건을 부정한 방법으로 매매함으로 성전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영성을 닮기를 원하는 우리는 분노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부정과 부패와 악을 도모하고 일삼는 패역한 이 세대를 보면서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분노는,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같이 아픔과 눈물이 가슴을 채우는 분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온 인류의 죄악을 온 몸에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이 백성의 죄악을, 내 민족의 죄악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분노하며, 아파하며,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분노를 통해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이 기독교 역사 속에는 많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세례요한의 분노가 그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면죄부를 팔며 심하게 부패한 로마 캐톨릭으로부터 종교개혁를 한 마르틴 루터가 그런 분이며, 만인평등의 원리를 들고 흑인의 자유를 위해 일어선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그렇고 또한 2차세계대전시에 히틀러와 싸우다 감옥에서 순교한 본회퍼가 그런 분들입니다.

 

히틀러의 독재아래 독일의 양심적 지식인과 신앙인들은 히틀러에 항거하다 감옥과 집단수용소,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본회퍼도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저항의 깃발을 들었어요. 히틀러는 교회까지도 그의 말에 복종하는 제국교회로 통합시켰습니다. 여기에 저항한 일부 목사들은 긴급 목사 동맹을 결성하고 제국교회에 반대하는 고백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고백교회는 목사의 파면과 투옥, 교회 폐쇄에도 굽히지 않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194345일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본회퍼를 체포했습니다.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는 혐의였어요. 정말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면 이는 비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군을 향하여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결코 폭력으로 대하시지 아니하셨어요. 아니 오히려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에 대항하여 칼을 뽑아든 베드로를 말리셨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

예수님은 비폭력저항으로,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으로 원수를 이기셨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본회퍼는 2년 동안 독일 각처의 강제수용소를 전전했습니다. 194549일 이른 아침 본회퍼는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교수대로 끌려 나갔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

본회퍼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진지한 자세로 기도한 뒤 처형대로 올라갔어요. 그는 다시 짧게 기도하고 용감하게 교수대를 붙잡았습니다.

 

본회퍼의 삶은 오늘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신앙 양심에 따라 자유와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위해 분노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작과 격려와 교훈으로 남아 마침표 없는 현재 진행형의 삶이 되고 있습니다.

 

본회퍼는 당시의 독일교회를 순종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은혜를 소유한 값싼 교회라고 질타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본회퍼의 이같은 질타를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새벽 우리 스스로에게 갖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과연 책임질 수 있는 분노를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마만큼 남 뿐만 아니라 내 스스로의 죄악에 민감한가? 그리고 나아가서 분노한 만큼 그 죄악을 가슴으로 끌어안고 희생하며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멜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이 새벽에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그와 같은 모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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