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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강해 01] 도망가지 말고 대응하라
운영자 2018-10-03 추천 0 댓글 0 조회 826
[성경본문] 룻기1:1-5 개역개정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도망가지 말고 대응하라

 

때는 사사시대였습니다. 색깔로 말하면 먹구름이 가득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왕이 없었어요. 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법은 있으되 사람들은 삶의 기준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삶의 기준도 없고 지침도 없으니 삶은 안정이 없었어요.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리로 저리로 흔들렸습니다. 내일을 바라보지 못하는 그 불확실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겨우 겨우 이스라엘의 역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어두운 시대가 되었는가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선물로 받았으나 그곳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의 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농업에 종사해왔던 저들은 하나님이 아닌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그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력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러셨는데 유혹은 너무 강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들어가고, 음란한 세속문화에 정신 줄을 놓아버렸습니다. 그 나마 겨우 겨우 역사의 명맥을 이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으로서 세상에 본이 되고 세상을 변혁시키기는커녕 모래수렁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처럼 완전히 없어질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시면서 마침내 사랑의 채찍을 드십니다. 전에는 주변 족속들이 쳐들어오게 하여 정신 차리게 하였습니다. 자유를 잃고 압제를 당하고 농사지어놓은 곡식을 빼앗기고 삶이 피폐해지면 그때서야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성민으로써의 거룩이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이웃나라의 침략이 아니라 비를 주지 않으사, 온 나라에 흉년으로 사랑의 매를 드셨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배고픔은 견디기 힘듭니다. 생존해야 합니다. 방법을 간구합니다.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금 여호와께 돌아가자 외치며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성민으로써의 거룩이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설정이 되면, 다시금 복된 인생으로 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에 눈이 어둡고 그 우상문화에 이미 젖어버린 백성들은 감이 없습니다. 그 그 기근이 와야 하는지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는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은 있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그 땅을 떠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여러 사람들 중에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의 가장의 이름은 엘레멜렉이요,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였습니다. 저들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말론과 기룐이었습니다. 이 가정의 얘기로부터 룻기가 시작을 합니다. 그 기근 속에서 생계가 어려워지자 가장인 엘레멕렉은 이곳을 떠나자, 모압 지방으로 가자 거기 가면 먹을 것이 있을거야~!” 가장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영적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왜 기근이 왔는지, 왜 고난이 왔는지 그 원인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분주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나야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저들의 고향 베들레헴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주 특별한 땅이었습니다. 베들레헴 그 이름의 뜻이 떡집” “떡을 만드는 방앗간이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을 이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의 고향이 될 것이었습니다. 나아가서 먼 미래에 인류의 죄를 사하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할 곳이었습니다. 떠나는 것이 대수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어려움이 임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고난이, 왜 하필 나에게, 내 가정에, 내 사역에, 내 사업장에, 우리 교회에, 우리 나라에.....!!” 이때에 믿음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올려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영적으로 깨어 있는가? 아니면 잠들어 있는가? 세상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닌가? 누구나 다 추구하는 세상의 넓은 문을 찾으며 그리로 가기 위해 넓은 길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다시금 깨어야지, 기도해야지, 다시금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인 Ralph Waldo Emerson‘The Conduct of Life'(인생운영) 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단지 그를 그 운명 속으로 더 들어가게 만든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 분의) 뜻을 벗어나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그 모든 노력은 결국 다시금 그분의 뜻으로 종결된다.” 이를 성경 구절로 해석하자면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33:11)

 

하나님께서는 때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야말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잘되기를 원하셔서 옳은 길, 복된 길,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방편입니다. 그 마지막은 그 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이 상황이 사람에게는 힘듭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보통 세 가지 모습으로 대응합니다.

첫째, 무조건 참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냥 견디고 무조건 참으면 그 상황에 눌림을 받습니다. 새소망이 없습니다. 변화도 변혁도 없습니다.

둘째, 그 상황을 피합니다. 도피하는 모습이에요. 상황이 힘드니까 책임지기 싫고 회피해 버리면 그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선한결과를 놓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는, 받아드리고 대응하고 대처하는 것입니다.(to enlist) 그러면 그 상황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상황을 다스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세 번째의 모습으로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주의 자녀로 삼으셨으니 주께서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 성경의 엘리멜렉은 믿음이 없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아니하고 모압땅으로 떠났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해결해야 할 일을 피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서 믿고 의지하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살길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비슷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약속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임했습니다.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복이 임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가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그 상황을 피합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에 가면 먹을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얽히고, 섥힙니다. 결국 생명의 위협을 느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애굽의 왕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저가 얼마나 후회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상황속에 긍휼을 베푸셔서 아내를 돌려받게 되지만 이후에 다시금 약속의 땅으로 돌아옵니다. 주께서 머물라 하신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견뎌야 했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저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인의 땅에 거하는 엘리멜렉의 가정은 불행합니다. 5절 말씀이죠. 아내를 남겨두고 두 며느리를 남겨두고 가장인 엘리멜렉 자신도 그리고 말론과 기룐, 두 아들이 모압 땅에서 죽습니다.

저와 아내가 네팔에서 학교사역을 할 때에 왕정부와 공산당과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한참 공산당 게릴라들이 왕의 군대와 내전을 벌일 때에 저들은 공작금을 구하기 위해 학교들을 찾아와서는 공작금을 요청했습니다. 자신들의 요청을 거절한 학교의 교장이 잡혀가서 구타를 당하고 돈은 돈대로 주고 겨우 돌아왔으나 일주일 동안 먹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실어증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또 한 학교는 공작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버스 두 대가 폭파당했고 또 어떤 학교는 컴퓨터실이 폭파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드디어 우리 학교에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내민 종이에는 저와 아내의 이름과 숨어서 하는 일, 신학교에서 전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적어왔습니다. 뒷조사를 한거죠. 그리고 저와 아내의 가슴을 떨리게 한 것은 저의 아이들이 어느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과 집이 어디에 있다라는 것을 적은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협조하지 않으면 키드냅도 불사하겠다는 것이지요.

 

저들은 1,750불을 공작금으로 요청했습니다. 주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그럴 여유도 없는데........ 우리 학교가 공작금을 준 사실이 발각되면 정부 쪽에서 가만히 안 있을 것이었습니다. 안 주면 이 공산당이 우리 학교나 제 가족에게 어떤 끔찍한 일을 할지 상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또 다시 선교지를 옮기라는 하나님의 싸인인가? 놀랍고 혼란스럽고 가슴이 떨렸습니다. "주님! 어찌해야 합니까?" 기도했지만 구체적인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다른 나라로 갈까, 한국으로 돌아갈까,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동료선교사들은 일단 고국으로 피신해 있으라고 조언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할수록 그 모습은 함께 동역하는 학교 교사들에게 책임을 회피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니 네팔에서 계속 머무르라는 뜻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상심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제 맘에 한 생각이 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령님을 통해 주시는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연정아! 월부로 하자고 그래라!" 순간 저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월부로 한다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안이었습니다. "그래 월부로 하자고 그러자 학교 재정도 어려운데..... 그러다가 정부군이 이기면 그만 주고...." 그게 통했습니다. 두 번을 주었을 때에 전세가 왕의 군대가 유리해지면서 저들은 지방으로 철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찾아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때에 제가 만일 네팔을 철수하고 다른 나라로 가거나 한국으로 돌아왔다면 오늘의 리빙스톤 학교는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견디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저와 아내의 헌신을 기뻐받으시고 학교를 계속 발전시켜 주셨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20154월 네팔에 대지진이 났을 때에도 있었습니다. 외국 선교사들과 유수한 선교단체 소속 선교사들은 임시로 철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선교사들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공황장애로 인해 아주 어려움에 처한 사모님들 몇분이 한국으로 후송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견뎠습니다. 그곳에서 기도하며 학교복구를 위해 그리고 지진 난민들을 도우며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이 되었을까요? 열여섯개의 교실을 잃은 리빙스톤학교의 소식을 들은 기도의 후원자들이 후원금을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몇 개월만에 18천만원의 모금이 되었고 필요한 열여섯개의 교실이 6개월만에 새로 건축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만일 그때에 그 상황이 너무 힘들어 자리를 피했다면 철수했다면 과연 교실이 다시금 세워질 수 있었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합니다.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땅,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고난이 왔을 때에 하나님께 회개하고 영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 다시금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힘드니 그 땅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려운 때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먼저 영적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대처해 나갈 적에 전화위복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 새벽에도 어려움 속에 처한 성도님들, 이 모습으로 영적으로 회복하시고 강한 믿음으로 일어나셔서 고난을 통해 선한목적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시시고 마침내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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