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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 31] 기준 없는 인생의 비극
운영자 2018-09-21 추천 0 댓글 0 조회 769
[성경본문] 사사기17:7-13 개역개정

7.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8.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9.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11.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12.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기준 없는 인생의 비극

 

 

삶에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기준이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요롭게 하는 기준이냐? 아이면 그 반대로 그렇지 아니하냐? 오히려 거꾸로 가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보여주는 성경구절은 잠언 910절에 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첫째는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요, 주관자가 되시며, 인류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또한 개인의 구원과 생사화복의 주관자자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십자가의 구속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는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믿음이란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 기준은 여호와 하나님이요, 기준을 지킨다함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계시해 주신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바를 말씀을 통해 잘 깨닫고 지켜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에요. 성경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믿음자체가 죽은 것(2:17) 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된 믿음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기준이 있는 삶이요, 그와 같은 믿음과 행함으로 사는 자를, 창조주 되시고 생사화복의 주관자가 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성경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기준이 없습니다. 그 시대가 그러했습니다. 176절의 말씀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오늘날은 그렇지 않은가요? 기준이 없으면 삶이 어지럽습니다. 정리가 안 됩니다. 기준이 없으면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요즈음 젊은 사람들 말대로 feel가는 대로, 그저 좋아 보이면, 따라갑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사람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관계를 제대로 맺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기준 있는 삶이에요. 그런데 자기만의 울타리를 쌓고 그 울타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다 제각기 인 것이에요. 철저하게 이기주의적 기준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랑이 각박한 세상이 되었습니까?

 

오늘 성경본문은 이 기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시대의 잘못된 사회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 땅에 살고 있는 부자 미가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습니다. 어머니의 큰돈, 은 천 백개를 훔쳤던 미가입니다. 그 어머니는 그 도둑이 자기 아들인 줄 몰랐지요. 그러니 그 어머니가 그 돈을 훔쳐간 도둑을 향해 저주를 퍼 붇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 려 미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 돈을 어머니에게 돌려줍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문제는 이제 그 저주를 풀기 위해서 그 돈의 일부 은 이백을 가져다가 한 신상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우상이에요. 그리고 자신의 집 신당에 두었어요. 그리고 그 신당와 신상 관리를 위해 자신의 한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기준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 중의 한 사람으로서 우상을 만들고 믿고 집안 신당에 들이는 혼합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두 마음을 품은 정함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아들로 제사장을 세웠습니다. 제사장 직은 레위지파에게 주어진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뜻대로기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주를 끊어내고 복을 얻기 위하여 자기 뜻대로 행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저주가 여러분의 가정에 있습니까? 생업의 현장에 있습니까? 사단과 마귀가 역사합니까? 그러므로 되는 일이 없고 상황이 어렵습니까? 정말 이 모든 재앙을 끊어내기를 원하신다면, 십자가에서 모든 저주를 몸에 지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끊어내시고, 사망의 쏘는 것까지 이겨내신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날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용서하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가 두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온 마음으로 예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이 모든 상황이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기준이 없는 미가의 집안에 한 청년이 찾아옵니다. 레위지파 사람이라고 했어요. 유다 지방에 살고 있던 청년이 이 에브라임 산지까지 오게 된 것은 당시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멀어지니 저들이 성소에 드려야 할 십일조와 제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레위족속의 한 사람으로써 성소에 거하며 생계에 필요한 것을 공급받아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 흘러, 흘러 이 에브라임 산지에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청년이 레위족의 한 사람인 것을 안 미가는 이 사람을 자신의 집안에 있는 신당에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우상신을 만들어 모신 신당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복을 얻고자 하여 사람들은 무슨 짓을 못합니까?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더 오래 장수하기 위해, 더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하여, 그게 삶의 기준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삽니다. 그저 열심히 삽니다. 어떤 경우는 정말 땀을 흘리고 애쓰며 하루 24시간이 모자라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독일의 시인 괴테가 말한 것처럼, “Life is not speed, but direction, 인생을 속도가 아니라 방향" 입니다.(Johann Wolfgang von Goethe) 여기에서 올바른 방향은 나침반과 같은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 기준이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어디가 제대로 된 방향인가? 하는 질문에 바로 하나님, 저 하늘나라를 골인지점으로 정하고, 이 땅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100년 남짓한 인생을 하나님 안에서 복되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습니다. 기왕이면 명문, 기왕이면 대기업, 기왕이면 고액의 연봉, 다 좋습니다. 그러나 먼저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 정말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습으로 서 있는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성품으로 행함으로 살고 있는가? 이 모습이 든든한 반석으로 기초를 쌓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이 우선적인 기준이 되면 모래 위의 세운 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여지없이 다 무너집니다.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이 레위 청년을 보십시오. 저는 분명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써의 일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부모로부터 또는 성소에서 선배들로부터 또는 제사장으로부터 청년이 되기까지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삶이 곤고하다 보니 돈에 눈이 어두워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기준을 잃어버립니다. 미가가 이 청년을 꾀입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복을 구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가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미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왜 미가가 이 청년을 제사장으로 집안에 들였습니까? 복을 더 받기 위하여, 그래서 기왕이면 자기 아들보다 레위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어요. 13절 말씀에 미가의 속마음이 나타납니다.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그러나 문제가 해결이 안되었습니다. 여전히 그 신당에는 우상이 있습니다. 기준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저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우상을 같이 섬겼습니다.

 

둘째로 이 레위사람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 신당에 우상이 있으면 그것을 없애든지, 미가의 신앙이 잘못되었으면 제대로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성소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운 레위족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이 레위사람이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제공해 줄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라는 미가의 감언에 넘어가고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오늘날 삯군 목자라는 말이 시작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네팔에서 사역을 할 때에 제 차와 리빙스톤 학교 버스를 고치는 자동차정비소에 사장이 있었는데 힌두교를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저와 오랜 친구가 되면서 복음 전하게 되었습니다. 저가 어느날 제게 말하는 거에요. 이제 자신이 예수를 신으로 믿는다는 거에요. 하는 말이 예수를 믿으니 정말 사업도 더 잘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냐고 축하한다고 정말 축하한다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저를 데리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거에요. 예수님 사진을 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들어가 보니 정말 어디서 구했는지 예수님 초상화를 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여전히 힌두교 신들인 쉬바, 비쉬누, 브라마 신들의 초상화도 같이 걸어놓았어요. 그리고 매일 아침 출근하면 그 앞에서 서서 복을 비는 거에요. 기존적으로 믿어왔던 힌두교신들에게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 믿게 된 예수님께도 복을 비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힌두교 신들 초상화는 다 없애고 오직 예수님 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다른 신들 초상화를 다 없앴어요. 성령님의 역사지요. 시간이 가면서 제대로 된 신앙으로 세례도 받고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삼아 교회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저의 신학교 학생 하나가 전도사로 그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 레위사람은 잘못을 잘못으로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돈에 눈이 어두운 삯군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미가 집안에 복이 임합니까? 그럴리 없지요. 화가 임합니다. 다음 장에서 잘못된 기준으로 살아가는 이 미가 집안이 어떻게 패망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그 일에 이 레위사람, 돈에 눈이 어두워 본분을 잃어버린 레위사람이 미가를 배반합니다. 그 에브라임 산지를 쳐들어온 단지파를 돕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더 많이 준다고 하는 단지파와 합세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올바른 믿음의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준이 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행여나 두 마음으로 품어 마음 한편은 세상적인 영화와 쾌락에 두고 마음 한편은 하나님께 두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노라~!” 믿음으로 선포하시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셔서 복된 인생, 승리로운 인생을 영위하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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