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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 21] 십자가의 은혜로 회복되어야 할 상처 입은 마음
운영자 2018-08-22 추천 2 댓글 0 조회 806
[성경본문] 사사기12:1-7 개역개정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5.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7.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십자가의 은혜로 회복되어야 할 상처 입은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저로서는 성경말씀의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 이렇게 마무리를 하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사사기는 계속해서 비극적 결말을 보여주고 있으니, 전하는 저로서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듣는 여러분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사기가 영적교훈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출발 처음부터 말씀드렸습니다. 사사기의 교훈은 이래서는 아니되겠다.” “이래서는 큰일난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가 큰 주제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오늘날 이 시대의 거대한 세파에 표류하고 있는 믿는 사람들과 나아가서는 교회의 모습에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거대한 세파는 세상적인 문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사기로 말하면 가나안 땅의 이방문화, 우상숭배 문화입니다.

 

그러한 가나안 땅의 우상문화가 이 시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 모습은 무엇보다 먼저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저 만치 제껴놓고, 끝없이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1) 인본주의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물질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2) 맘몬주의가 있어요.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으니 진리가 아니다. 그러니 신은 학문과 지적추구의 영역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므로 영적인 일에 관심을 멀게 하는 3) 과학지상주의가 있는가 하면, 모든 종교와 단체의 신앙고백이 진리이지, 진리가 하나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4) 다원주의가 이 시대의 가나안 땅 우상문화입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이러한 세상 문화가 그저 세상에만 있으면 우리가 가까지 하지 않고 성별된 삶을 살 수 있겠는데, 그런데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도 세상에 두발을 딛고 살고 있으니 자꾸만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풍조를 교회 안에까지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도 이 세상풍조가 자꾸만 세력을 떨치고자 합니다.

 

보십시오. 인본주의는 사람을 높이고자 합니다. 사람의 인정과 인기, 명성을 좋아합니다. 교회 안에 없습니까? 왜 없겠어요. 교회의 성도는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행함과 실천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인데, 직분을 감투로 알고, 하나님 보다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 그 모습입니다. 미국교회에서는 장로님 되는 게 그 책임이 너무 부담스러워 서로 안 하려고 해요. 무엇보다 시간을 드려야 하고 또 물질을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장로로 안 뽑히면 자존심 상한다하여 아예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내년에 우리교회가 장로님을 뽑아야 하는데 저는 벌써부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건제시를 다음 주 기도주간을 마치고 나면, 아예 일년 전에 미리 하려고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느냐? 사람을 두려워하느냐? 가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증거로 공예배를 빠지지 않고 제대로 드리는지, 기도생활을 제대로 하는지(새벽기도회와 금요기도회), 말씀에 있어서는 이단을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똑 바로 서 있는지, 그러니 성경공부 프로그램들을 잘 이수했는지, 또한 십일조를 포함하여 헌금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사역적으로는 교회의 제직회에 속하고, 기관에 속하여, 교회사역에 깊이 참여하고 있는지, 또한 성도들을 덕으로 잘 섬기는지, 그래서 성품으로 성도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지,이러한 내용이 기준이 될 것입니다. 저의 기도는 첫째, 이러한 분이 있기를 기도하고, 둘째, 이런 분을 주께서 세워주옵소서~! 입니다.

 

오늘날 신성한 교회에 침투한 이 세상풍조 인본주의를 한 예로 들었습니다만 정말 주의해야 하고 또 늘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성을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도 담임목사인 제가 또 바로 서도록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또한 말씀사역을 하는 교역자들과 구역장들이 말씀의 기준위에 제대로 서서 이 인본주의에 영향 받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있도록, 사람의 술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목회의 기준이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사사 입다에 대해서 마지막 시간을 갖습니다.

입다는 야곱의 초창기의 모습과 같이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기생을 어머니로 두고 한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서 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아서 그럴까요? 나에게 운명은 없다. 성공은 쟁취하는 것이다.” 하는 전투의식이 강했습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야망을 이루고자 타협과 협상에 능통한 입다, 문제는 그것이 사람에게는 통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데, 저가 하나님과도 협상하려고 사람을 제물로 드리겠다는 서원까지 하여, 결국 무남독녀 자신의 딸까지 잃게 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길르앗 지방의 수장으로 서는 일을 허락하시지만 일이 잘 풀리지가 않습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입다를 대적하여 나섭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여호수아를 배출한 지파지요. 가나안 땅 정복에 혁혁한 공을 세운 여호수아의 지파이니 암몬 족속을 물리치는 일에 입다가 불러주지 않은 것을 괘씸하게 여깁니다. 그것이 1절 말씀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이와 같은 에브라임 지파의 모습이 과거 기드온이 삼백 명의 용사와 더불어 미디안 족속과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에도 있었습니다. 전쟁은 하지도 않으면서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의 권위와 명분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기드온은 지혜롭게 처리하여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멜렉의 맏물 포도보다 훨씬 더 상품이니이다.” 아비메렉은 기드온이 속한 므낫세 지파입니다. 비교논법으로 저들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그럴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지요. 쟁취하는 자, 양보가 없는 자, 원래 어릴 적부터 힘이 쎈 용사 출신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 에브라임 지파의 허영심을 직언으로 되받아 칩니다. 2절과 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2.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틀린 말이 아니었어요. 사실입니다. 그런데 입다가 과거 기드온과 달리, 이처럼 에브라임 지파에 대해 고자세로 나오게 되었던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참 언어사용은 언제고 중요합니다.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길르앗 사람들을 에브라임 땅에서 도망한 자들로 표현합니다. 비겁한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출신이 명예스럽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길르앗은 지명 이름입니다. 요단강 동편 북쪽 땅입니다. 원래 므낫세 지파에서 주어진 땅이었어요. 그런데 길르앗 지방은 크게 보면 요단강 동편 전체를 일컫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이 길르앗 사람들을 도망자로 표현하는 것은 멸시하는 투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죠. 입다가 제 고향을 떠나 잡류들과 한패가 되었더니 길르앗 사람들도 입다와 다를 바가 없다. 저들도 도망자들 이었다.”

 

그러니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이 뿔이 난 것입니다. 결국 동족간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참 과격한 언어의 사용이 이렇게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결국 동족상쟁의 비극을 불러 온 것입니다.

 

전쟁은 길르앗 사람들이 이겼습니다. 이제껏 암몬 족속과 전쟁을 하며 승리를 해온 이 실전의 경험 앞에 오랫동안 전쟁의 경험 없이 명예와 명분만을 앞세웠던 에브라임 지파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단강 나루터에서 죽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사만 이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제 사사 입다의 얘기를 마치면서 우리가 어떠한 교훈을 받습니까?

사람들은 태어난 출신배경부터 시작해서 자라온 환경, 그리고 누구 밑에서 배우고 또한 어울리며 살았느냐, 또한 어떠한 문화적인 영향력을 받으며 살아왔느냐에 따라 사람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입다라고 하는 인물은 신체적으로 건장한 체격과 싸움에 능한 자였으나, 불행한 출신배경과 형제들에게 따돌림, 고향 떠난 자가 되어, 스스로 생존해가야 하는 굴곡진 삶을 살면서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협상과 타협 그리고 전쟁을 통해 갖고자 하는 것을 다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종교의 영향을 받아 인간제물을 조건으로.... 전쟁의 승리를 주옵소서!” 하나님과도 협상을 하고자 하니 결국 자신의 무남독녀 딸을 잃는 큰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출신성분을 비웃는 에브라임 지파에 분을 못 이겨 싸우게 되니 동족상쟁이 일어나고, 승리는 하였으나, 4만 이천명의 죽은 자가 자신의 동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도 이 다양함이 존재합니다. 다 달라요.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끼리인데도 다 달라요. 교회 안에는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귀한 것은 그 상처가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다름을 하나로 만드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치유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가 되는 기준이 됩니다. 이 말씀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영적으로 우리 모두는 강한 자나 약한 자나 할 것 없이,

다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예수의 피로 신비한 연합을 이룹니다.

말씀은 복음이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 사랑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이 강한 세파에 시달려 상하고 멍든 가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치유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아픔과 설움과 고통과 인정받지 못함과 따돌림과 그 모든 상처를 싸매주시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사 입다는 그 상처의 치유가 필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지 못하니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도 이 새벽에 이 복음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행여나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쓴 뿌리, 아픔과 설움, 버림받았다는 감정이 남아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 쏟아 놓으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주님께서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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