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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33]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운영자 2018-04-25 추천 0 댓글 0 조회 991
[성경본문] 출애굽기20:17 개역개정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남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외적인 면을 강조하는 계명들과는 달리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가 마음에 관한 것이었어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마음에 어떤 존재도 신으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2계명으로부터 9명까지 외적인 행위로 인해 그 잘됨과 잘못함이 판명되는 계명이었다면 이제 마지막 10계명은 다시금 내적인 계명을 주시므로 십계명을 마무리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법은 외적인 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알바 아니요, 자유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이 비슷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집중하게 되니 외식하게 되고 그 속마음은 더럽기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겉은 멀쩡한데 속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모습과 같다고 예수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여러분, 왜 열 번째 계명을 이처럼 내적인 것으로 마무리 지었을까요? 율법의 완성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외적인 것으로 계명을 다 이루었다 교만하지 마라. 하나님은 사람의 그 속마음을 보시느니라 잠언서 162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그런가하면 이스라엘의 왕을 예정하실 때에 기름을 부으러 가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성도 여러분, 내적으로 바르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자가 심령의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심령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는 차원이 다른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자로 서셔서 이와 같은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제10계명은 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탐하다라는 히브리어는 성경에는 두 가지로 쓰입니다. 출애굽기 2017절에는 하마드로 쓰이는데 이 단어는 외부에 있는 것을 보고 감정의 충동을 일으켜 탐을 내는 행위를 말할 때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신명기 521절에 다른 히브리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바라는 말로 사용되는데 이는 마음속에 있는 욕망 때문에 생기는 탐심을 가리킵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으로 생기는 탐심인 하마드나 또는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내면에 만족을 가지지 못하고 생겨나는 내적인 탐심인 아바나 둘 다 사용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두 금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 탐심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웃의 집 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남의 물질 또는 물건에 대한 탐심입니다. 성경의 예로는 아합왕이 이세벨과 함께 자신의 땅이 아닌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고 결국 나봇을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았던 모습이 그 모습입니다. 결국 엘리야 선지자의 경고대로 저가 전쟁터에서 활에 맞아 죽고 그의 피를 개가 핥습니다.

 

둘째는 사람에 대한 탐심, 즉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에 대한 탐심을 금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내는 다윗의 경우입니다. 이 탐심은 불처럼 타올라서 남녀의 불륜뿐만 아니라 살인까지도 낳게 됩니다.

 

탐심, 탐욕은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다 차지합니다. 여지가 없어요. 그러니 하나님을 경배할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표현했습니다. 골로새서 35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러면 우리가 탐심이 없음을 무엇으로 증명 할 수 있습니까? 남을 것을 욕심내지 않고 실제로 취하지 않으면 다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열 번째 계명은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 탐심이 없는 마음은 결국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주신 시간과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시간, 내가 쓰는 물질이 언제고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만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웃을 향하여 열려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 어떤 분은 교회 안에 그렇게 잘 알려진 분도 아니도 직분자도 아닌데 십일조를 많이 내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감사헌금도 많이 냅니다. 그 모습을 볼 때에 제가 갖는 생각은 ~! 이분이 수입이 많구나~!”가 아닙니다.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나님께서 복을 많이 주셨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제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분은 물질에 있어서 자유함을 입은 분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탐심으로부터 자유함을 많이 입은 분이구나~!” 생각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적은 액수의 십일조를 드릴 때에는 시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입이 많아지게 되면, 부동산 매매를 통해 큰 수입을 갖게 되면, 큰 액수의 십일조를 드려야 할 때에 고민하지 않고 기꺼이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물질의 탐심으로부터 자유함을 입은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는 그 물질관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탐심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의 삶을 통해서 배우는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4:11)고 고백했습니다. 빌립보서 412절에 고백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기에서 배웠노라 라는 말은 헬라어로 만다노라고 하는데 이는 행동이나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알게 되었다 체험하였다 그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나,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4:18). 저가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 이 땅에서 추구할 가장 기쁘고 만족할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 저에게는 최고의 가치였고 행복이었습니다. 돈이나 세상의 것들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을 얻는 삶이 누리는 만족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아프리카로 떠난 적도의 성자라 일컫는 알버트 슈바이쩌와 같은 분을 통해 보게 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와 같은 모습에서도 발견합니다. 이미 그와같은 모습은 탐심, 탐욕같은 것은 마음에 없습니다. 정말 있다면 어려운 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하여 필요를 가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눈에 보이는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고 영원한 것,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시고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 하는 고백이 여러분의 마음에 울려퍼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주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했으므로 모든 필요를 주께 맡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삶 속에서 경험하여 깨달은 일체의 비결이란 다름 아닌 은혜로 사는 비결입니다. 자족이란 스스로 만족한다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자신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삶속에서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때로는 빈에 처할 줄도 알고 때로는 부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이미 그는 눈에 보이는 소유에 대한 탐심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여하한 상황에서도 은혜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경험으로 인해 고백하였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셋째, 나누는 삶이었기에 탐심이 없습니다.

삶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복음을 나누었습니다. 탐욕의 반대는 나눔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기 시작하면 탐욕이 없어집니다. 미움의 반대는 사랑이듯이 내 안에 찾아온 탐욕을 없애는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다 남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내 시간, 내 은사, 내 물질, 내 명예를 모두 어렵고 힘든 자들,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나눌 때에 탐욕이란 내 안에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탐심은 우리 자신과 이웃을 불행하게 하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십계명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계명은 탐내지 않는 수동적인 자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네 이웃의 행복을 위해 힘써라는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을 행복지침으로 믿으시고 지키시므로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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