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강해 06] 십자가의 은혜로 바뀐 나의 신분
- 운영자 2024.10.8 조회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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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은혜로 바뀐 나의 신분
사도바울의 편지를 받았던 에베소 지방, 에베소 교회의 교우들은 거의 가 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사도바울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고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자부심도 대단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세상 여러 민족 중에 우리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특별한 존재다.” “율법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율법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 당시에, 세상에 유명한 법전이란 앗시리아의 함무라비 법전인데, 유대인들은 “그까짓 것~!” 이라고 여길 정도였어요.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사람의 생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주신 것이다.” “돌판에 십계명으로 그리고 다른 율법들로 직접 주신 것이니, 감히 비교할 바가 못된다.” 그러므로 그 율법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인들은 아주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이방인들과 다르다.” 이스라엘인들은 신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외적인 표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할례’에요. 오늘날 포경수술이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라.”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유대인들은 신체적으로 그 표를 가졌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입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인데, 축복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경외하라 그리하면 네가 이 땅에서 잘 되고, 자손과 민족의 번성할 것이요, 땅을 기업으로 얻고, 건강과 장수를 누리며, 재화의 복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환란의 날에는 구원받게 될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체결하신 축복의 말씀들이었습니다. 그 ‘언약’이 실제로 환란의 날에도 힘과 소망이 되었고,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고비마다, 인생의 고비마다 언약대로 친히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언제나 세 가지 감사를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1)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 2)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 3)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
세월이 흘렀어요.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 번째, 감사인 남자로 태어나게 하신 감사도 변했고, 둘째 감사인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도, 종 제도가 없어졌으니, 변했는데, 여전히 첫째 감사인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감사는 지금도 안 변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의 이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지독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담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명절마다 순례객들로 가득 찰 때, 요세프스라는 역사학자에 의하면 270만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제물로 드리려고 끌고 온 양만 27만 마리였다고 합니다. 대단하죠? 그런데 성전에는 세 자리로 구분되었으니, 중요한 중심자리는 제사장만 들어가는 ‘제사장의 뜰’ 그 다음 동편에는 ‘이스라엘의 뜰’로 유대인만 들어가고, 그 다음 더 동쪽에는 ‘여자의 뜰’로 유대인 여자들이 출입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디에서 성전 제사에 참여했는가? 그 성전 뜰 아래로 다섯 계단을 내려오면, 벽으로 둘러싸인 연단이 있고, 그 벽의 다른 쪽으로 열네 걸음을 더 걸어가면, 또 다른 벽이 있는데, 이 벽의 두께가 1.5미터나 되었어요. 그 벽 밖에 이방인들이 운집하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도 성전이 보여요.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으니, 그 높은 벽 위에는 경고문이 써 있었어요. “이방인으로써 안으로 들어오는 자는 처형된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받는 에베소교회 교우들을 포함하여, 이방인들은 “나는 그 특권에서 소외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인의 모습은 버려진 존재였어요. 바울은 이러한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이방인들의 실체를 오늘 말씀 11절과 12절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선택받은 유대 백성들과 비교하니 이방인들은 버려진 존재요, 관심 밖의 존재요, 구원이 없는 존재요, 그러니 불쌍한 존재요, 소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상상을 해 봅니다. 과거 우리나라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의 조상들도 그러지 아니했나요?
말씀에 보니 이방인들은 없는 것이 많아요. 12절에 보니,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그러므로 (1) 예수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하니 (2) 선민의 시민권도 없습니다. 그 다음 말씀에 “언약들에게 대하여는 외인이요.” 말씀하니 (3) 언약도 없습니다. 그 다음 말씀에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4) 소망도 없습니다. 그리고 12절 끝에 보니,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라고 말씀하니 (5) 하나님이 없었다.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요, 소망이 없습니다. 죽어라 땀을 흘리고 잘 살려고 하지만, 그래서 나름 돈도 벌고, 먹고, 살만하지만, 그 영혼의 신분자체가 달라요. 그 영이 죽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나눈 내용이에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는 어떠한 사람이다? 영이 죽은 사람이다. 영이 죽은 자은 어떠한 신세라고 했어요?
영이 죽은 자는 1)영원한 생명이 없다. 영이 죽은 자는 2)신령한 것을 도무지 인지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감흥도 느낄 수 없으며, 심령의 진정한 자유와 평화도 없다.
3)영이 죽은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우리 사회도 그래요. 그 심령에 성령께서 내주하지 않는 자, 마음에 평강이 없어요. 국민소득지수는 올라가는데, 그래서 물질적으로 더 풍요롭게 사는 것 같은데....,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불만지수가 올라갑니다. 자살율은 OECD국가 평균의 두배가 될 정도로 월등히 높습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에요. 그런가하면 대형 병원은 그 수가 점 점 더 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병원이 모자라다고 합니다. 세워진 병원들은, 한번 세우면 문 닫는 일이 없어요. 그렇게 운영이 잘되는 것을 보면, 과학이 발전하고 편리하게 잘 산다고 하지만 환자는 그치지 않고, 계속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질병으로 누운 가족이나, 친구가 순서 없이 사고로 떠나는 모습을 보면, 세상이 미워지고, 인생이 허무하고 또한 죽음의 공포가 가슴을 짓누릅니다.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그의 영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십자가의 보혈이 그 안에 역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에요. 구원받지 못한 자는 영적으로 죽었으니, 늘 방황하고 유리합니다. 그 마음에 불안과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 않아요. 이 모습을 우리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영적인 이방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예수 믿는 사람은 근심도 없고 염려도 없나?” 전혀 없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지 아니하는 자와 달라요. 달라도 아주 많이 다릅니다. 그 다른 것은, “근심도, 염려도, 걱정도 마음을 빼앗지를 못해요.” 그러므로 오랫동안 그 상태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안좋은 감정을 떨쳐버립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 심령 안에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이에요. 주의 영이 그 심령에 안위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또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요. 환경을 보는 눈이 달라요. 환란 중에도 소망을 봅니다. 어둠 중에도 빛을 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신령한 복을 받고, 마음의 눈 즉, 영안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웠던 때, 국민들은 밖에 나가기를 꺼려하니, 안방에서 텔레비죤을 많이 시청했어요. 그중에 소위 대박친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미스터 트롯, 또는 미스 트롯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가요 프로그램을 통해 국민은 위안을 받고, 메마른 감정이 촉촉해지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믿는 사람도 가수들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했어요. 듣다 보면,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고 하니, 그게 은혜라고 착각을 했어요.
여러분, 세상의 예술과 음악과 노래와 문학을 통해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어요. 그러나 거기까지 일 뿐이에요. 사람의 본체인 영혼은 오직 주의 영으로만이 참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으며, 영혼이 생기를 얻고 소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 있는 성도들은 모르고 있어요.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영적으로 기가 죽어 있어요. 믿는 자에게 주시는 주가 예비하신 그 힘과 지혜와 능력을 깨닫지 못하니, “그렇지 않다! 확실히 알아라! 너희의 실체를 확실히 알아라!” 오늘 말씀으로 알려주시는 거에요.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에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는 것이, 혈통으로 아니라고 했어요. 유대인의 혈통이기에?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가 하면 육정으로? 즉 믿음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자녀로 태어나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뜻으로? 즉 권세있는 사람이 “너는 구원받았다”라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축복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관계 죄로 인해 원수처럼 되어 버린 관계를 완전히 허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니, 사람과의 원수의 관계도 화목을 이룬다 고 말씀하고 있어요. 이게 바른 순서죠. 하나님 앞에 죄로 인한 원수 관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종지부를 찍는 일이 발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예수님의 피로 멀리 있던 이방인들,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 누구겠습니까? 과거, 이 나라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 이방인이었어요. 이 모습은 예수 믿기 전에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선택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함께 읽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성전에서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을 나누는 그 두껍고 높은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허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애물을 허시고 하나로 만드셔서 둘 다 차별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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