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기 강해 05] 정죄하지 말고 위로하고 격려하라
- 운영자 2022.11.29 조회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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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욥기4 : 1 - 21 | 개역개정
-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 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 3.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 4.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 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 6.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 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 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 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 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 11.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 12.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 13.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 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 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 16.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 17.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 18.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 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 20.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 21. 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
정죄하지 말고 위로하고 격려하라
우리는 욥기를 읽어나가면서 욥에게 닥친 고난을 통해 “믿음의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닥쳐올 수 있구나!”라는 현실을 봅니다. 욥의 됨됨이는 훌륭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고 또한 하나님도 그를 인정했어요. 욥기 1장 1절과 또 2장 3절에 말씀합니다.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성경기자도 또한 하나님도 욥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그처럼 졸지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몸은 병들었으니,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그럼요. 예를 들어 아직 죄를 알지 못하는 어린 아기가 심장병으로 고통당하는 모습을 볼 때, 선교사로 헌신한 부부의 자녀 둘이 선교지에서 그 추운 밤에 석유난로를 끄지 않고 잠에 들어 세상을 떠난 경우를 볼 때, 우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 착한 사람에게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신단 말인가?” 그와 같은 모습을 볼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욥을 찾아온 세 친구 중에 가장 연장자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그 상황을 분석하고 자신의 견해로 설명합니다. 그 어려움에서 구원받을 대책을 욥에게 제시합니다. 그의 주장이 이러해요.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지은 죄를 회개하면,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과응보’라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죄가 있으니 네가 고난을 받는거다.” 맞는 말입니까?
그의 주장을 잘 보여주는 4장 7절 8절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욥4:7~9)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그의 생각에는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것이지요. 또한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있는가?” 그의 생각으로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거꾸로, 잘 되고, 잘 사는 사람은, 다 죄가 없이 선하게 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엘리바스의 말이 100프로 잘못된 말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심판이 그러합니다.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고 선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보편적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것이 ‘因果應報’(인과응보) 또는 '信賞必罰'(신상필벌)로 다 설명되지 않아요.
이에 대한 욥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6장에 24절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욥6:24) “내게 그런 잘못이 있다면 얘기해 보라 그러면 내가 회개하리라” 욥이 엘리바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친구 엘리바스는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영적인 경험을 욥과 친구들 앞에서 간증합니다. 그 내용이 4장 12절 이하 마지막 절까지 이어집니다. 그 영적인 경험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15절부터 16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욥4:15~17) 무슨 뜻이겠어요?
“사람이란 본래 불완전한 존재요,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다 다 죄인이다.” 이 진리를 자신은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서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만일 틀렸다 하면 그의 환상은 거짓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의 주장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인생이 격는 모든 고난에 천편일률적으로 다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인가하면, 그렇지않는 경우도 있다 라는 것을 그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장합니다. “고난은 죄의 결과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한다.” 이 명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시작된 원죄를 설명할 경우 맞습니다. 성경은 로마서 3장 23절에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인 아닌 사람이 없어요. 그 결과로 에덴동산의 평화와 행복과 샬롬은 깨졌습니다. 인생은 생로병사의 단계를 거치며 사망의 저주에서 자유함을 입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로마서 3장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이 구절에 근거하여 질문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즉 의인이 된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의인들도 고난을 당합니까? 의인들도 인생의 고난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럼요. 그럴 수 있습니다.
가깝게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독일 나찌쯔에 대항하다가 포로가 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본회퍼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순교하신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이어 12절에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2)
이 의인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얻는 영적교훈이 있습니다.
성도 중에 누군가 선하게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질고로 인하여, 위기에 몰린 사업으로 인하여,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하여, 인생의 고난의 때를 맞이하고, 영혼의 캄캄한 밤을 통과할 때, 엘리바스와 같은 모습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회개하라, 하지 마시고,
그 힘들고 아픈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마시고, 곁에서 함께 울고, 함께 가슴 아파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며,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인과응보’라는 틀에 묶여 그 말이 보편적으로 옳은 말이라도 다 통하는 것이 아니에요. 6장 25절을 찾아가 함께 읽겠습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욥6:25)
한국 전쟁당시 한국에 선교사로 온 루벤 토레이 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36년간의 중국사역을 마치고 65세의 나이에 새로운 비전을 품고 한국 땅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그가 중국에서 사역을 할 때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정신을 잃게 되었는데, 수술을 받고, 병상에서 깨어나고 보니, 한쪽 팔이 없어졌습니다. 잘려 나간 것이었습니다. 당시 의학실력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마음을 어떻게, 어떻게 추스를 수 있을까요?
며칠간 고통의 밤을 지낸 후 토레이 선교사는 그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신뢰하며 고백했습니다. “아직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어서 하나님이 내 목숨을 살려주신 거야. 지금까지 두 팔로 해온 모든 일을 한쪽 팔로 하는 법을 배우면 돼.”
그가 병상에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한쪽 팔을 가져가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두 팔을 주셔서 잘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저의 한쪽 팔을 가져가셨음을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니까 곁에 그를 아는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교통사고 당해서 팔이 하나 날라가더니 정신도 날아가 버렸다. 팔이 없어졌는데 감사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그래도 끝까지 이 루벤 토레이 선교사님은 하나님께서 팔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팔을 가져가신 것도 감사하다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다시 기회를 허락하셨어요. 미국으로 돌아가 재활치료를 받던 그는 의수와 의족 만드는 법을 직접 배웠습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전쟁터에서 팔과 다리를 잃은 수 많은 사람들이 있는 나라로 자원하여 가게 되었으니 바로 6.25전쟁 당시인 1952년에 미국 장로교회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한국 땅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재활병원을 시작하여 의수족을 만들어 보급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재활의학을 시작했습니다. 전쟁 중 팔 다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인조팔과 다리로 재활하는 일로 주의 사랑을 전하였어요. 그의 도움으로 인조다리를 갖고 재활하게 된 한 사람은 고향마을을 송두리째 주님께로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크고 귀하게 쓰임 받은 그는 자신이 왜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중국에서 팔을 잃지 않았었으면 이렇게 한국에 와서 팔다리 잃은 사람을 사랑하고 의수족을 만들어 줄 수 없었을 텐데....,” 그는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는 71세까지 한국에서 주의 사랑을 전했으니 그 동안 그의 도움으로 의수와 의족을 갖게 된 사람은 무려 45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루벤 선교사 부부가 대한민국을 떠나는 날의 모습을, 그의 딸 루벤 클레어 존슨이 쓴 루벤 토레이 선교사의 전기인 ‘내 사랑 황하를 흘러’(좋은씨앗刊, 2009)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김포공항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찬송을 부르며 언젠가 주님 품에서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환송했다.” 그리고 그는 1970년 2월 23일 83세의 일기로 하늘 아버지의 품에 안겼습니다.
의인에게도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정죄는 금물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보다는 함께 울고 위로하고 격려하시고 기도해주십시오. 고난 속에 역사하시는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깊으신 뜻 앞에서 우리는 주의 사랑과 은혜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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