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강해 15] 어리석은 자
- 운영자 2019.9.2 조회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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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14 : 1 - 7 | 개역개정
-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 5.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 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어리석은 자
오늘 시편 14편은 “어리석은 자는” 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자를 원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자의 반대겠죠. 그러면 “똑똑한 자”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하기를 “어리석은 자”의 반대말이 “똑똑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잠언 9:10의 말씀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리석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큰 차이점을 발견합니다. 그 기준이 명확히 다른 것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삶의 모습은 결국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기준, 가치관의 기준, 세계관의 기준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없다” 라는 기준으로 사는 사람은 그 기준이 “사람”입니다. 이를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고 사람이 생각이 기준이 된다” 는 뜻입니다. 그러면 반대편의 기준은 “인본주의”의 반대이니 “신본주의”입니다. 그 기준이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지능지수가 낮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학교를 많이 다니지 못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누구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인생”이 모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삶의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흔들립니다. 모래위에 세운 집의 모습입니다. 그 기준이 사람이니 계속 변해요. 왕정시대는 왕 한 사람의 정치철학에 따라 흔들리고, 공산주의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흔들립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들의 대표자들이 서로 의논하고 좋게 여기는 것으로 뜻을 모으니, 그 시대에 따라, 사람의 생각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풍조를 이루어, 그 모습을 사람들은 쫓아갑니다. 이것을 소위 ‘문화’라고 합니다.
이 모습은 계속 바뀝니다. 사용하는 교과서도 바뀌고, 역사해석도 바뀌고, 논문도 바뀌고,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아닙니다. 그러니 저들은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합니다. ‘상대적 진리’만 있을 뿐입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 생각중심으로 이루어진 그 기준의 한계입니다.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주인이 없어요. 생명의 주가 없고, 삶의 주가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대상이 없어요. 자기가 주인입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뜻대로, 살아요. 저들은 생각합니다. “똑똑한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어~!” 똑똑한 사람이 세상을 쥐락 펴락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세상을 자기생각대로, 자신의 권력으로, 국민을 선동하며 이끌어가려고 합니다.
때로 자기 꾀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왜 그렇다고 했습니까?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어요. 두려움의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니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양심도 필요 없고, 도덕도 무너집니다. 오늘 말씀처럼 그 결과는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고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4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 도다”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여깁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모르는 거에요. 아니면 부인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니까, 어쩌다가 태어났으니까, 생물학적으로만 이해해요. 눈에 보이는 것이 다입니다. 저들에게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혼은 없어요.
공산주의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 기준에 생명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없어요. 그러니 생명 귀한 줄 모릅니다. 공산주의는 그 기준이 유물론입니다. 영은 없다. 신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다. 포이에르바흐의 사상을 계승하여 유물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칼 마르크스의 “하나님은 없다”는 무신론 주의자들 입니다.
그러니 ‘인간존엄성’은 없습니다. 사람이란 뭐냐? 그저 유용한 물건과 또는 물질과 같은 것이에요. 많이 유용하면 살려주고, 도움이 안 되면 처분합니다. 북한의 수없는 숙청과 총살형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중국정부의 통제를 받는 작금의 홍콩 국민 시위 사태가 어떻게 해결될지 궁금합니다. 과거 천안문 광장 사태처럼 무력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숙청했던 그 모습이 안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바로 그 결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의 삶의 인도자가 되시고, 바른 생각으로 갖게 하시며, 그러니 이 땅에서 선한 삶을 살게 하시고, 또한 저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삶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러니 하나님은 나의 구세주요, 삶의 주인이 되신다.” 이 확고한 믿음위에 거하는 자는 그 인생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역사, 그 용서하심으로 이루신 구원의 역사로 하나님의 성품이 그 영혼에 다시금 소생되고 회복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되니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귀한 거에요. 소중히 여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영원히 살 영혼을 하나님께서 그 안에 두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남편, 아내, 자녀, 교우, 이웃....., 그러니 가난한 자, 어려운 자들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입니다. 왜 사는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안타까운 거에요. 아버지의 마음이죠. 그러니 말씀으로 전합니다. 진리를 전합니다. 그래서 전도합니다. 그 기준이 인본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그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똑똑하고, 힘 있고, 신체적 조건이 뛰어나고, 남 보다 앞서는 자가 누리고,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겁이 없어요. 왜 그렇다고 했습니까?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에요.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그렇게 교만하다가 좌충우돌합니다. 크게 다칩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들, 그리고 견고하게 믿음이 서 있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합니다. 거부당합니다. 무시당합니다. 심지어는 구속당하고....., 그러면 깨달음이 와야 하는데.....,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면 변화가 없어요. 그러면 결국 비참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십니다. 어두움 속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날이 닥쳐옵니다. 너무 늦은 것이지요. 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해요. 무엇을 감사합니까? 내가 예수 믿은 것을 제일로 감사해야 해요. 광야와 같은 인생여정에 방황하지 않아요. 천국으로 가는 확실한 나침판을 가진 것입니다. 방향이 똑 바로 정해졌어요.
뿐만 아니에요.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니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영혼이 주 안에 있으니 근심 염려 걱정, 다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랑 많으신 우리 주님께서는 이 새벽에도 우리의 영혼을 참 안식의 자리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모습이 6절 말씀에서 설명됩니다. 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말하는 자들이 한때 세상을 지배합니다. 군림합니다. 악한 세상이지요. 여전히 개혁되어져야 할 세상입니다. 그곳에도 예수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은 지켜 보호하십니다. 그의 의를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신하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은 단지 재산이 적거나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말씀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억압과 죄의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시니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한다고 말씀합니다. 자유와 기쁨을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이 믿음 확신이 우리의 가슴에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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