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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 48] 선을 행해도 부당히 고난을 받을 때
운영자 2021-03-05 추천 0 댓글 0 조회 701
[성경본문] 시편44:9-17 개역개정

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11.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13.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4.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15.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16.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선을 행해도 부당히 고난을 받을 때

 

오늘 시편 44편의 내용은 마치 두 편의 시가 하나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총을 찬송합니다. 색깔로 말하면 밝은 빛이요, 날씨로 말하면 햇볕이 좋은 맑은 날입니다.

 

그런데 9절부터 분위기는 급반전을 보이니 25절까지 이어지는 그 내용이 슬픔과 탄식으로 가득합니다. 색깔로 표현하자면 어두운 색이요, 날씨로 보면 먹장구름이 가득한 날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대적들에게 침노를 당하도록 내 버려두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도살당할 양들처럼 버려두시는가? 왜 도와주시지 않으시는가?” 하는 시인의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조적인 내용으로 한 시를 이루어지게 된 배경이 있으니 상황이 이러합니다. 현재 시인과 그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국의 침략을 받아 그야말로 나라의 존폐위기 속에 처하였습니다. 진군해 들어오는 적을 대항하여 물리칠 힘이 없어요.

 

그 시대적 배경은 히스기야왕 때에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한 사건(왕하 18:13-19:37)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온 유다가 초토화 되고, 예루살렘마저 함락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시인은 과거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시고 적들을 물리치셨는지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 얘기를 선조들로부터 들어 왔던 것입니다. 함께 1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또는 부모님으로부터 또는 친척 어르신으로부터 믿음의 얘기를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일제강점기 때에도 믿음을 지켰는지, 6.25전쟁 중에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지켜 보호해 주셨는지..., 그러한 얘기들은 간증이 되어 후손들의 가슴에 새겨지게 됩니다. 이 모습이 오늘 시편 기자의 모습이요,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가 들려주신 믿음의 얘기들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모르던 집안에 시집와서 온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된 일, 그런 중에 나타난 집안의 우환과 그 뒤에 역사하는 사탄의 공격, 마을 주민 모두를 예수 믿게 하기 위해 매일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없는 마을에서 기도처소가 없으니, 집 앞, 연자방아의 돌바닥은 어머니의 새벽기도처소가 되어 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마귀와 귀신이 물러가고 온 집안 식구가 예수를 믿고, 마을 주민의 90프로가 예수를 믿게 되고, 그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6.25 동란 때에 들어온 공산당이, 저의 마을에 처들어 오고 제일 먼저 잡으려는 인물이 저의 아버지였어요. 갑자기 처 들어오게 되니, 놀란 어머님은 옆집으로 피하고 그 때에 6.25 동이로 출산한 갓난 아가는 다락방에 숨겨놓고, 어머니는 나뭇간에 검불을 덮고 숨었는데, 공산당이 우리 집에 사람이 없으니 옆집까지 조사하게 되고, 그 방에 들어가서 뒤지게 되었는데, 그 때에 간절한 어머니의 기도는 주님, 아가가 깨어나 울지 않게 해주세요. 아가가 깨어나 울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사 그 다락에 있던 아가가 그 난리 통에도 소리 없이 잠에 들어 있었으니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 아가가 바로 우리교회 김연항 장로님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어머니로부터 이러한 얘기들을 자주 들었는데, 그것이 가슴에 새겨지고, 장성해서도 여전히 가슴에 간직하고 있으니, 선교지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지금 고국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암 그렇고 말고~!”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럴 때마다 건지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었고 지금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자녀들 앞에서 손주들 앞에서 살아있는 간증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는가를 자꾸 얘기해 주셔야 해요.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그럴 때에 우리의 자녀들의 심령에는 신앙의 뿌리가 내리는 것이에요. 더 깊이, 깊이 자리를 잡게 되니 삶의 위기가 닥칠 때에, 누구보다 더, 세상 의지할 그 어느 것보다 먼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게 되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의 가정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자자손손 마침내 믿음의 가문을 이루어가는 것이에요.

 

오늘 시편 기자는 그러한 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자주 많이 들어 그 마음에 새겨진 것입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나라의 민족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나라도 다를 바가 없어요. 일제강점기에서 그리고 6.25 낙동강 전선에서 그야말로 나라의 존폐의 위기에서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도 꺽지 않고 살려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은혜를 베푸셨는가?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즉, 사랑하셨기 때문에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전입니다. 현실, 작금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요. 자신의 선조들이 경험한 그 샬롬, 그 승리, 그 평화가 없어요. 여기에 시편기자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너무 슬픕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이런 아프고 슬픔에 가득한 내용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이 얼마나 큰 비극이요, 어려운 상황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것 같아요. 여기에 아픔이 일고 고통이 있습니다. 23절과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이러실까요? 왜 이렇게 냉정하신 것일까요? 그저 쉽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래~!” 또는 너무 주를 멀리하고 세상길로 나가서 그래~!” 그래서 하나님도 나를 외면하시는 거야!”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내용이 여기에 있어요. 그것은 이러한 극한의 어려운 상황가운데 처한 시편기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세이니...., 17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주의 언약도 어기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신실하게 주를 섬겼는데도 이런 어려움에 봉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깨닫는 것은 꼭 지은 죄 때문에 고난이 오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일까요?

 

하나님께서 의인을 고난에 처하도록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인물 중에 욥이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의인으로 주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그가 하루아침에 거지와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불같은 환란이 그를 엄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욥은 주를 바라봅니다. 주를 원망하지 않고 변함없이 주를 바라봅니다. 그가 이런 고백을 해요.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1:21,22)

 

성도 여러분, 살다보면 때로 내가 애매히, 부당히, 고난을 받는다.” 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데 하나님은 가만히 계실까? 왜 내편에 서 주시지 아니하실까?” 그럴 때가 있어요.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박해가 그랬습니다. 오늘날 닫혀 있는 선교지가 또 그렇습니다. 이유는 하나에요.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다는 이유 그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어요.

 

그 때에 사도 베드로, 예수님의 그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보고 이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새롭게 태어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19절과 20절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주후 300년경에 마카리우스라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에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동네 사람들 까지도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 동네의 어떤 처녀가 임신을 하게 되어 사람들이 그 아기의 아버지를 캐물으니까 마카리우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소문에 소문이 전 마을에 퍼져서 마카리우스를 이중인격자로 수도원에 탄핵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에서도 그렇게 경건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가 미심쩍어 하면서도 결국 그를 해고시켰고, 죄 없는 마카리우스는 수도원에서 쫓겨나서 평민이 되어 세상에서 일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카리우스가 일을 하면서 돈을 벌면 그 아이를 낳은 어머니에게 양육비로 쓰라고 생활비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러갔습니다. 그럴수록 그 아기 어머니의 마음은 힘들었습니다. 점점 더 양심에 가책이 되었어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저가 스스로 대중 앞에서 실토했습니다. 아기 아버지는 따로 있는데, 마카리우스라고 하면 자신의 입장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했습니다.

 

진실은 밝혀지게 되었고, 동네 사람들은 이 마카리우스를 더욱 더 존경하고 칭송하게 되었어요. 수도원에서도 그를 다시 불러들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누명을 씌울 때에 왜 가만히 있었냐는 질문에 마카리우스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계획하신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때가 되면 밝혀질 것을 그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당장은 알 수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뜻은 너무 깊고 깊어서,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는 다 헤아릴 수가 없어요. 요셉도 그러했지요. 욥이 그러했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성도 여러분, 빈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고난 이후에 부활이 있었음을 묵상하면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편 44편의 시인의 부르짖음은 어떻게 됐을까요? 마지막 26절 그의 탄원의 기도가 이러합니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 시의 배경이 되었던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자신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선민 이스라엘을 공격한 앗수르의 산헤립과 그의 군대는 완전히 패망합니다. 열왕기하 1935절이하의 기록이 이러합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하19:35~37)

 

말씀을 맺습니다. 어려운 때에라도 주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행하며 참고 인내하며 주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내 시간표가 아닌 주님의 때에. 내 방법이 아닌, 주님의 방법으로, 가장 선하신 방법으로 크신 상을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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