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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 46]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운영자 2021-03-03 추천 0 댓글 0 조회 581
[성경본문] 시편42:6-11 개역개정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우리 인생이 늘 평안하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눈물은 없고 웃음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국에 들어와서 덕담으로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어요. 꽃길만 걸으세요.” 정말 우리 인생이 꽃길만 걸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바람을 영어로 wish라고 하는데 이루어 질 수는 없으나 그러기를 바라는 거에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러기를 바라는 희망이라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희망이 아닌 소망이 있으니, 소망은 희망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소망은 바라는 바 근거가 있으니, 상황, 환경, 여건을 주장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둡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희망은 막연히 바라는 것이라면, 그래서 운이라고 한다면, 소망은 막연한 것이 아니요, 광대하고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그 때를 확신하며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42편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아직 오지 않고 있어요.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시편 42편은 성경에 보니 그 제목이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어요. 고라 자손은 누구인가하면 다윗시대에 찬송시를 편집하는 일을 맡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고라 자손이 직접 쓴 시 라기 보다는 다윗의 시를 고라 자손이 편집한 것입니다.

 

마스길은 히브리어로 그 뜻이 교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교훈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새벽에 우리가 그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 성소와는 너무 멀리 가 있습니다. 이유는 쫓기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다윗이 예루살렘에 거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를 죽이려는 사울왕 때문이거나 또는 압살롬의 반란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성전에서 너무 멀리 가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 중에 그 장소가 나타나니 6절 말씀이에요. 함께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요단 땅과 헤르몬 미살 산 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가장 북쪽에 있는 땅이니 예루살렘하고는 너무나 떨어져 있는 곳이요, 헤르몬 산은 그 지대가 높아서 만년설이 쌓여 있는 많이 추운 곳입니다. 요단강의 발원지가 그곳에 있습니다. 물이 많은 곳이에요. 그러므로 7절에 보니 폭포가 등장을 합니다. 이 폭포 소리는 주의 폭포소리라고 했어요. 폭포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삶이 심히 어려운 가운데 처해 있는 시편 기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물이 많은 곳에서도 시편기자는 목마름을 느낍니다. 그의 영혼이 목마른 것입니다. 채움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함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기 전 13년이란 세월을 유랑합니다. 도망자의 모습으로 살았어요. 이곳, 저곳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적국인 블레셋에까지 갔었어요. 건기 철에 물이 없는 남쪽 지방에는 모든 것이 말라비틀어지는 환경입니다. 그 환경에서 어찌하든지 살아야 하니, 생존을 위해 물을 찾는 사슴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현재의 자신의 모습, 자신의 신세와 닮았다는 것입니다.

물이 많이 있는 요단과 헐몬산에서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실 것, 먹을 것, 육신의 필요를 채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심령이 그의 영혼이 핍절하여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 이유 중에 제일 직접적인 이유는 앞서 말씀드렸어요. 예루살렘 성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 나아가 예배드리며 주를 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이 말씀은 성전에 나아가서 성전예배에 나아온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찬송 부르며 제사를 드리고 예배하며 기도하는 중에 얻는 그 기쁨, 그 환희와 영광이 너무 그리운 것입니다. 4절 말씀에서 그 간절함을 또 볼 수 있습니다. 함께 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 도다

 

예배드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복음의 불모지, 선교지에 가보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정부의 감시로 몰래 숨어서 예배를 드리니, 과거에 중국이 그랬고, 지금은 북한이 그렇지요. 한 번의 예배가 그렇게 소중하고, 예배 때마다 감동의 눈물이 흐릅니다.

 

오늘날 이러한 예배의 소중함을 알 리가 없는 국가 정부요원들 중에, 또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 또는 믿어도 믿음이 없는 자들은 코로나19로 인해 확진자 줄이는 일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아무리 예배의 중요성에 대해 소리를 높여도 신경도 안 씁니다. 철저히 예방조처를 하고 드린다고 해도 귀 기울여 듣지를 않아요. 왜 그렇겠습니까?

 

예배가 뭔지 모르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 모습이 10절에 기록된 표현입니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오늘 성경본문 3절에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요.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우리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예배하는 것이에요. 가정에서 몇몇이 앉아 가정예배로 드리는 모습도 귀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 증거하는 강력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예배가 살아나는 것이에요.

 

과거 여의도광장에서 있었던 대규모의 예배, 민족복음화 대성회라든지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오셔서 가졌던 ‘74년도 엑스폴로 부흥회라든지, 136만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1만명의 성가대가 찬송을 드렸으며, 매일 밤 철야기도회가 1만명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질까요?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렇게 쉽게 말할까요? 예배가 뭐 그리 중요해, 취미생활아냐?” 오늘날 이 시대의 모습처럼 그렇게 폄하할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두려워하겠지요. 경외감을 갖겠지요. 뭐가 있기는 있는 것 같다.” 감히 함부로 폄하하거나 비아냥거리지 못하겠지요.

 

오늘 시편기자는 그 아름다고 규모가 성대한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를 기억하며, 그리워하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 한탄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는 모습은 생사가 달린 일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럴 때가 있습니다. 이는 곧 2절의 말씀처럼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장 최고로 체험하는 곳이 예배의 현장이에요. 거기에는 찬송과 말씀과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께 하는 거룩한 무리가 형제, 자매로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소생함과 회복의 역사가 있는 곳이 예배의 현장입니다.

 

어제 저녁에 오늘의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제 마음에는 예배에 나오시지 못하는 성도님들이 떠올랐습니다. 특히나 이 코로나19로 인해 오고 싶어도 그야말로 목마른 사슴이 그토록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모습의 성도들이 생각이 나고 그 안타까운 모습에 제가 말씀 묵상의 진도가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말씀 묵상을 멈추고, 한 분 한 분 여러분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요양원에서 일년이 넘도록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코로나 전에는 찾아뵙고 함께 예배드리고 기도했는데 그것마저 하지 못하니 얼만 힘드시겠습니까? 그래도 전화를 받으셔서 감사하고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짠했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라고 격려하고 간절히 기도해 드렸습니다.

 

또 한분은 이제 눈이 거의 보이지가 않으세요. 코로나 기간에도 제가 가끔 방문하고 뵈었는데 전화를 드렸더니, 교회가 리모델링을 한다고 소식 들어 기도하고 있는데 어떤 모습으로 단장을 했는지 정말 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너무 안타까워 제 마음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또 어떤 권사님은 걷기가 너무 힘드시쟎아요. 코로나 전에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셔서 천천히 겨우 겨우 걷는 발걸음으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셨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하시니 기도하는데 우시는 거에요. 마음이 많이 힘드신 것이지요.

 

그런가하면 또 한 권사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맘대로 못해. 자녀들이 보고 있잖어. 그래서 비대면으로 예배 드리는데 양이 차지를 않어. 어서 속히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리고 싶어.”

 

저는 주일이면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세가 93세세요. 그 먼 곳에서, 성남에서 차를 몇 번 갈아타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시는 모습을 뵐 때마다 감동이 임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오늘 시편 말씀 그대로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더욱 주께 가까이 나와 주님 전에서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자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샘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듯이 막연한 희망이 아닌 소망이, 생명수가 그 가슴에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주님 전에 나온 여러분들이 그러시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시편 42편에 두 번씩이나 똑같이 반복되어 나오는 구절이 있으니 5절과 11절입니다. 11절 말씀을 읽으면서 가슴에 담고 우리도 다시금 일어나 소망 중에 전진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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